[광화문에서/김명희]대통령과 기업인의 낡은 신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16일 03시 00분


코멘트
김명희 여성동아 차장
김명희 여성동아 차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은 6월 13일 열린 코나 신차 발표 행사에 흰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차림으로 등장해 주목을 받았다. 특히 화제가 됐던 건, 군데군데 해지고 때가 탄 흔적이 역력한 운동화였다.

돈이라면 아쉬울 것 없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왜 그런 신발을 신었을까 싶지만 사실 그가 착용한 브랜드는 낡은 스타일을 내세워 이름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 이탈리아 명품 골든구스다. 이 브랜드의 신발은 ‘신상(新商)’부터 어찌나 낡았는지 백화점 매장에서 구입하면 교환, 환불이 안 된다. 구매자가 신발을 사서 착용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공들여 세월의 흔적을 불어넣은 골든구스 운동화를 몇 번 신다가 세탁소에 맡겼더니 특유의 구제(舊製) 느낌이 사라진 정체불명의 흰색 신발로 돌아와 좌절했다는 ‘웃픈’ 에피소드도 전한다.

누군가가 신다가 중고 숍에 내놓은 듯한 신발은 요즘 패션계에서 유행하는 아이템 중 하나다. 5월 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구치 패션쇼에서도 퀴퀴한 냄새를 풍길 것 같은 커다란 운동화가 등장했다. 지난 수십 년간 빠른 속도로 새로운 제품들을 선보이며 소비자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지갑을 열게 한 신발의 트렌드가 도달한 최정점이 도둑도 가져가지 않을 법한 낡은 신발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낡은(혹은 낡은 척하는) 신발을 ‘신상’으로 구입한다는 건 사실 아이러니다. 낡음이란 그에 도달할 때까지의 과정을 품고 있을 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골든구스가 처음 미국 백화점 매장에 입점했을 때 ‘명품 브랜드의 가난 코스프레’라는 비난을 받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패션계의 유행과는 좀 거리가 있는 이야기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청각장애인들이 제작한 수제화를 5년 가까이 신은 사실이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안겼다. 미셸 오바마 여사도 최근 한 행사에서 남편인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기간 내내 공식 행사에서 같은 턱시도와 구두를 착용했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문 대통령은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80%를 넘나드는 지지율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고, 오바마 전 대통령 역시 퇴임 후에도 식지 않는 인기를 자랑 중이다.

두 정치인의 성공이 단지 낡은 구두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겠으나 낡은 구두가 지금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많은 것들이 생산되고 빠르게 소비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요즘 시대에 오래된 것들이 주는 감흥은 분명히 있다. 시간을 함께한 것에는 이야기가 있고, 너그러움과 편안함이 깃들어 있다. 국민들이 문 대통령의 낡은 신발에 열광한 것도 거기에 묻어 있는 지나온 삶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땅을 딛고 몸을 지탱하는 신발은 소득 수준부터 취향, 성격까지 의외로 주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반짝반짝 광이 나는 구두에선 ‘신발이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라는 신분 상승 욕망이, 난민 캠프 아이들이 구호품으로 받은 커다란 신발에선 그들 앞에 펼쳐질 인생의 자갈밭이 연상된다. 스티브 잡스가 평생 고집한 검은색 터틀넥 티셔츠와 청바지, 운동화는 세상을 바꾼 괴짜 천재의 상징이 됐다.

동화 속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만큼이나, 앞에서 언급한 명품 브랜드의 비싸고 낡은 신발은 평범한 우리에겐 멀고 먼 이야기다. 하지만 낡은 신발은 누구에게나 있을 테니 지금 당장 신발장을 열어보시길. 대통령이나 CEO 같은 삶은 아니라 해도 부끄럽지 않은 나의 삶이 그 속에 있을 테니까.
 
김명희 여성동아 차장 mayhee@donga.com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현대 코나 신차 발표#문재인 대통령 구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