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종수]여전히 고난 속에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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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 맞은 안중근 의사 조카며느리, 모진 인생 끝에 이제 요양원 병상에
정치권은 항일기념일 행사에 골몰… 올해도 작년처럼 이벤트만 넘칠까
日 이길 국력 배양과 유족 예우 먼저

이종수 객원논설위원·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이종수 객원논설위원·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월요일 새벽 어두울 때 나는 집을 나섰다. 거리에는 새벽 기도와 예불 가는 사람들의 종종걸음만 보였다. 출근 전 지방의 요양원에 누워 있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며느님, 다시 말해 안 의사 동생인 안정근 의사의 며느님을 문병하고 싶었다.

나는 2017년 8월 19일자 ‘동아광장’ 칼럼에서 안중근 후손들의 어려움에 대해 전한 바 있다. 이 칼럼을 보고 한 독지가가 이들을 돕겠다고 나섰지만 후손들은 “귀한 마음을 이미 감사히 받았다”며 끝내 기부를 고사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독지가는 이 돈을 연세대에 기탁해 후손들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1년이 지난 이제야 후손에게 돈이 전해지는 과정이 일부 진행 중이다.

병상에 누워 계신 안정근 의사의 며느리 박태정 여사를 만났다. 그분은 서울대 영문과를 3년 다니다 외국계 회사에 취직했다. 거기서 안정근 의사의 아들 안진생을 만났다. 진생은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탈리아로 유학 가 선박을 공부했다. 안중근 의사는 순국 직전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유언을 남겼다. 큰아들을 신부로 키워줄 것과 집안의 자식들은 조선의 미래를 위해 공학을 공부시키도록 부탁했다.

마지막 면회 사진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세 사람 중 둘이 안 의사의 동생 정근, 공근 형제다. 사형을 선고받은 형을 만나러 두 동생이 길을 떠날 때 어머니는 ‘떳떳이 죽기를 바란다고 형에게 전해라’고 했지만, 차마 그 말을 못 하고 두 동생은 울기만 했다. 그러다 형이 순국하자 두 동생 역시 모든 걸 버리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정근은 형처럼 중국에서 눈을 감았고 우리는 아직 그의 무덤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진생은 해군으로 복무 후 외교관을 하였으나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쫓겨나며 분노와 충격으로 쓰러져 1988년 사망했다. 공직 생활을 하는 내내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공직에서 득을 보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진생이 죽은 후 부인이 시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밝혀 안정근 역시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남겨진 가난은 오롯이 박태정 여사의 몫이었다. 35년 동안 집안을 짊어져 온 그가 구순의 할머니가 되었고, 이제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할 듯 보인다. 병원에서 학교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많은 생각이 창가에 스쳤다.

우리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리고 안중근 의거 110주년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기념식과 이벤트를 풍성하게 치르고 말 것인가. 유족들은 어렵게 방치한 채 기발한 프로그램이나 북한과 공동으로 진행하는 행사에 집착할 것인가. 지난해 광복절 기념식에서처럼 TV 드라마에 일제 형사로 출연하는 탤런트를 등장시켜 애국가를 부르게 할 것인가. 진보와 보수 사이의 망국적 갈등을 그대로 두고 3·1운동을 기념하는 만세를 부르며 독립선언문 낭독 릴레이를 펼칠 것인가.

기념식과 이벤트보다 우리에게는 3·1운동을 현재형으로 되살리는 사회운동이 필요하다.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고 통합을 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그 힘으로 통일을 꿈꾸고 일본을 넘어서는 실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설령,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우리의 가슴에 묻는 한이 있어도 그 정신을 현재형으로 살리는 게 중요하다. 이벤트와 반일(反日) 감정을 자극하는 정무적 수완은 박수받을 일이 아니다.

인터넷을 보면 과거 친일파를 처단하지 못한 일에 많은 젊은이가 분개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과거에 대한 분노가 현재의 아픔을 치유하는 노력으로는 연결되지 않고 있다. 뼛속까지 상처 입은 유족들을 돕고, 각 분야에서 일본을 넘어서는 실력을 기르는 운동으로 번져가게 하는 게 100주년을 올바르게 맞는 길이다. 안중근 의사의 글씨를 트럭에 새긴 청년에게 환호하는 순수한 열정들을 그 길로 안내해야 하지 않을까. 광복은 우리에게 진행 중이다.
 
이종수 객원논설위원·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독립운동가 후손#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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