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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최재경]법치주의는 안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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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최재경]법치주의는 안녕한가

최재경 객원논설위원·법무연수원 석좌교수입력 2018-05-11 03:00수정 2018-05-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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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조현민에 무리한 영장 청구… ‘판사 파면’ 청원 법원에 전달한 靑
여론에 헌법과 법률 절차 왜곡시켜
헌법 근본가치 훼손 없으면서 자유·인권 보장돼야 정의로운 것
최재경 객원논설위원·법무연수원 석좌교수
대한항공 조현민 전 전무가 자신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다고 광고회사 직원에게 물컵을 집어던졌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보통사람이면 훈방에 그칠 수도 있는 일에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세관은 그녀와 부모의 자택을 두 번이나 압수수색하면서 전 가족을 상대로 밀수 혐의를 수사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대한항공 전·현직 직원과 시민 수백 명이 보기에도 섬뜩한 흰색 가면을 쓰고 조 회장 일가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이 착용한 가면은 ‘벤데타(Vendetta)’ 혹은 ‘가이 포크스(Guy Fawkes)’ 가면이다.

가이 포크스는 1605년 11월 5일 영국에서 대량의 화약으로 국회의사당을 폭파해 왕과 대신들을 몰살시키려다 발각돼 처형된 사람이다. 벤데타는 20세기 말 파시즘이 지배하는 가상의 영국에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폭력을 행사하는 무정부주의자 브이(V)의 복수극을 그린 만화 작품이다. 이 가면은 좌절한 군중이 신분을 숨긴 채 공권력과 법률, 즉 기존 체제의 전복을 꿈꾸는 저항의 상징이다.

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게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하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재판장의 파면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빗발쳤다. 청와대가 사법권의 독립 때문에 ‘재판에 관여하거나 판사를 징계할 권한이 없다’고 답변해서 일단락되는가 싶더니 담당 비서관이 법원행정처에 청원 내용을 전달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보도되면서 논란이 확산됐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요소다. 민주주의는 직접 혹은 대의제를 통해 전체 국민의 의사가 국가 수행 과제와 문제에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법치주의는 입법 행정 사법 등의 모든 국가 작용이 헌법과 법률에 기속된다는 뜻이다. 국가 의사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결정되고 법치주의에 근거해서 집행돼야 한다.

법조계는 조 전 전무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이 무리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하지만 워낙 비난 여론이 거셌고, 경찰도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잘못된 재벌 가족의 행태는 엄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야지, 일시적으로 분노한 여론이나 막연한 다중의 의사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가 절제를 잃거나 왜곡된다면 더 큰 잘못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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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검사가 ‘피해자 측이 처벌을 원하지 않고, 법리 다툼의 소지도 있으며 증거 인멸 우려도 낮다’며 조 전 전무에 대한 불구속 수사를 지휘했다. 균형 감각을 갖고 과잉 사법을 통제하며 적절하게 수사를 지휘했다. 검찰 제도의 존재 의의를 제대로 입증했다.

국민청원 문제는 여론으로부터의 사법부 독립이라는 관점에서 신중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판결이 부당하면 상소해 다툴 일이지 법관의 파면을 촉구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다수의 의사라고 항상 옳지 않고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다수결은 국가 의사를 신속하게 결정해야 하는데 합의나 절충이 불가능할 때 부득이 쓰이는 차선의 의사 결정 기술일 뿐 민주주의의 본질은 아니다. 그것이 정당화되려면 인권 보호와 권력 분립 등 헌법의 근본가치를 훼손하지 않아야 하고 충분한 논의와 숙고 등 합리적 절차가 담보돼야 한다. 대한변호사협회가 ‘청와대 관계자가 대법원에 청원 내용을 전달한 것이 사실이라면 법원의 독립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도 그런 우려 때문이리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역사적 남북 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 이후 우리는 앞으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급변의 소용돌이 속을 지나고 있다.

평화와 통일이 구두선에 그치지 않고 자유와 인권, 정의가 지배하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견인할 수 있도록 사회 각계의 냉정한 분발과 노력이 필요한 시기다. 정부와 법원은 물론이고 변협, 학계 등 법조계가 한마음 한뜻으로 치밀한 연구와 법조 교류 등을 추진하면서 민주·법치국가 건설을 위한 법률적 제도적 뒷받침에 나서야 한다.
 
최재경 객원논설위원·법무연수원 석좌교수


#조현민#가이 포크스#청와대 국민청원#민주주의#법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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