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우영]근로시간, 멀리 보고 논의하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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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시간 단축, 공감대 형성됐지만 급격한 단축은 현장에 큰 혼란 불러… 최소 20년 후까지 고려한 대안 마련해야

이우영 한국폴리텍대 이사장
이우영 한국폴리텍대 이사장
국민소득 3만 달러대에 접어드는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불평등은 ‘확장된 상대적 빈곤’을 의미한다. 국가의 경제 규모가 확대되고 저성장 궤도에 진입하면 사회적 불평등에 관한 일반 국민의 관심은 급격히 높아지고, 상대적 빈곤의 범위는 ‘부의 분배’ 문제와 아울러 건강 등 ‘웰빙’, 그리고 개인의 삶 속에서 ‘정신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일과 생활의 시간적 균형들을 포함하게 된다.

최근 정부는 ‘일자리 정책 5년 로드맵’에서 근로시간 단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여야 정치권 및 노사단체 모두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현행 근로기준법 개정의 취지와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다만, 적용 시기 및 산업 업종별 특성이나 기업 규모, 특례업종 지정, 휴일연장수당 등에 관한 견해차가 절충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근로기준법 개정안 통과가 어려우면 정부의 행정해석을 바로잡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현행 행정해석은 1953년 근로기준법 제정 이후 일관되게 적용돼 온 것으로 일주일은 토, 일요일을 제외한 5일로 간주하고 이럴 경우 법정 근로시간 40시간, 평일 연장근로 12시간에 휴일 근로시간 16시간을 포함해 최대 68시간의 근로가 가능하다. 만약 정부의 행정해석이 변경돼 최대 근로시간이 주 52시간으로 줄어들면 완충장치가 미비한 상태에서 노동시장은 물론이고 산업현장 전반에 큰 혼란이 우려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 근로자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2000년 2512시간에서 줄어 2016년 2069시간이었다. 같은 기간 OECD 평균은 1829시간에서 1763시간으로 줄었다. 근로시간 단축 논의는 노동생산성 고려가 필수적인데 우리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000년 18.4달러에서 2015년 31.8달러로, OECD 평균은 38.9달러에서 46.8달러로 늘었다. 우리와 비슷한 근로시간을 갖는 칠레나 그리스와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이들과 비슷하거나 약간 높은 편이다.

현재 논의 중인 근로기준법 개정은 그간 고성장을 전제로 했던 제도나 법규의 낡은 틀까지 포함하는 전반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여야 한다. 이것은 횡적인 ‘개혁’이 아닌 종적인 ‘혁신’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 앞으로 최소 20년 후 우리 근로환경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아울러 노동 문제를 둘러싼 이해당사자들뿐 아니라 다양한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급격한 기술 변화가 함께 고려되지 않으면 근로환경과 노동시장도 예측불가의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노동세계의 디지털화로 인해 노동의 시간적 공간적 경계가 사라지고, ‘언제 어디에서’가 아니라 ‘항상 모든 곳에서’ 일해야 하는 시대에 근로시간의 정의는 어떻게 내려야 할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어쩌면 주당 최대 근로시간에 대한 논의가 더 이상 의미 없을 때도 올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미 세계는 디지털 플랫폼 경제의 도래에 대비하여 새로운 노동정책을 준비하고 있다. 독일의 노동 4.0을 비롯해 스웨덴의 주당 35시간 근로 실험, 프랑스의 재량근로제 및 연결차단권 등 논의의 방향을 보면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 우선’ 정책이다.

한 국가와 사회가 가진 역량이 한정된 상황에서 모든 경우에 대비하는 완벽한 정책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갈수록 커지는 노동환경의 불안정성 속에서 정부 역할의 증대 또한 분명한 현실이다. 상상력과 창의력에 기반을 둔 정책과 법제도 정립, 그리고 수시로 변환할 수 있는 유연한 맞춤형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야말로 정부와 국회가 해야 할 영역이다. 그 방향으로 가려면 근로자들의 유연한 권익 보호를 위해 노동법의 역할을 줄이고 노사 간 협의에 많은 권한을 부여해야 하며,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적시에 대응할 수 있는 근로자 교육도 잊어선 안 된다.

지금까지 우리의 눈부신 산업발전은 ‘빠른 추격자’를 통해 이뤄 왔고, 이제는 ‘선도 실행자’의 위치에서 새로운 도전의 시기를 맞고 있다. 법과 제도의 혁신에서도 선도 실행자의 역할이 필요하다.

근대적 의미의 노동이 정립된 것은 산업혁명이었다. 이제는 새로운 향후 20년의 시야로 노동법 논의에 임해야 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그 길의 나침반은 상상력과 창의력이다.

이우영 한국폴리텍대 이사장
#근로시간#일자리 정책#근로기준법 개정안#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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