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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최진석]은유는 창조와 협력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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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최진석]은유는 창조와 협력의 원동력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입력 2017-08-26 03:00수정 2017-08-26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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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는 협력의 뜻
이질적인 것들 사이 유사성 발견해 연결, 결국 창조로 이어져
융합-통섭-협치도 은유에서 출발해야 진보와 발전 이룰것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탁월한 인간을 ‘은유하는 인간’이라 했다. 은유하는 인간이 인간 가운데 가장 세다는 말이다. 은유를 통해서만 인간은 창의적인 활동력으로 삶의 영토를 확장하고 세상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 삶의 영토를 확장하고 윤택하게 해주는 사람은 당연히 보통이나 일반을 넘어서서 지배자의 반열에 오른다. 그래서 지배자의 반열에 오르려는 사람은 은유 능력이 갖춰져 있어야 제대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생활이 좀 궁핍하더라도 은유의 달인들인 시인(詩人)을 지배자의 위치로 모시고 존경하는 것이다.

은유란 바로 협력한다는 뜻이다. 협력은 아무런 공감대 없이 단절되어 있는 것들끼리 딴살림을 차리다가 서로 연결되어 공감대를 만들어 넓혀가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연결과 협력과 은유와 창의는 모두 한 가족이다.

좀 풀어서 보자. 은유란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되던 이질적인 두 가지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한 후, 그 유사성을 근거로 상호 개방하여 연결한다. 은유가 일어난 것이다. 이 ‘연결’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전략적으로 확장할 수 있다. 확장이 개시되도록 꿈을 꾸는 일이 상상이고, 확장의 전개를 시도하는 의지가 창의며, 창의의 결과가 창조다. 스티브 잡스가 “창의성은 연결하는 것이다(Creativity is just connecting things)”라고 한 말의 의미가 이것이다. 따라서 창조와 창의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으므로 인간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인간은 은유하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은유적인 문장 하나를 들어보자. ‘시간은 수다쟁이다.’ 원래 ‘시간’과 ‘수다쟁이’는 아무 관계없이 단절된 다른 두 가지다. ‘시간’과 ‘수다쟁이’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나 동질성도 없다. 그런데 탁월한 한 사람에 의해서 이렇게 다른 두 가지가 연결되었다. 무엇을 가지고 연결했는가. 그 사람이 발견한 연결의 근거, 즉 동질성은 무엇인가. 바로 어떤 것도 드러내 버린다는 성질이다. 시간도 결국에는 비밀의 커튼을 열고 무엇이든지 드러나게 하고, 수다쟁이 역시 감추는 것 없이 무엇이나 쉽게 폭로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간’은 ‘빠르다’나 ‘귀하다’라는 기존의 의미 외에 모든 진실을 드러나게 해준다는 새로운 성질을 부여받고, 또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수다쟁이’도 인간들 가운데 특이한 하나의 유형이었을 뿐인데, 이제는 ‘시간’이라는 관념을 수용하여 그 의미의 색깔이 달라졌다. ‘수다쟁이’ 역시 자신의 외연이 한층 더 넓어졌다. ‘시간’과 ‘수다쟁이’의 외연이 서로 넓어짐에 따라 당연히 그 둘이 이루던 세계의 ‘영토’도 덩달아 넓어졌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은 자신이 사는 세계 자체를 점차 확장한다.

이렇게 보면 은유는 비틀기다. ‘시간’은 ‘수다쟁이’ 앞에서 자신이 견고하게 지키던 원래의 정체성이 뒤틀리고, ‘수다쟁이’는 ‘시간’을 맞이하려고 스스로를 비틀어 놓았다. 뒤틀린 틈새를 허용하고 또 끼어들어 전혀 달랐던 둘은 상대방을 의지하며 새로 태어난다. 새 ‘시간’이 되고, 새 ‘수다쟁이’가 된 것이다. 바로 창조다. 이리하여 견고한 정체성이 죽음 같은 고정성에 제한받지 않고 은유를 통해 생명력을 새롭게 부여받으면서 현재를 뒤흔들어 미래를 향한 문을 활짝 열 수 있게 한다.

은유는 단순한 수사법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창조적이고 확장적인 삶을 이루는 뛰어난 기술이다. 이 기술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협력으로 구현된다. 융합이나 통섭이나 협치나 하는 것들이 모두 은유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인다. 은유가 되었든 협력이 되었든 중요한 것은 자신을 줄이고 양보하고 조금이나마 무너뜨리는 일에서 비로소 시작된다는 점이다. 자신이 무너지지 않거나 뒤틀리지 않고는 은유가 불가능하다. 창의와 창조가 은유의 결과라면,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도 진보와 발전은 협력으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틀에 갇힌 사람은 과거에 갇힌 사람이자 스스로를 과거화하는 사람이다. 정체성을 견고하게만 다지는 사람이다. 결국 은유와 협력이 미래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은유#아리스토텔레스#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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