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광재]검증시스템으로 공약 남발 막아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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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국민들은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대통령 탄핵까지 불러온 엄청난 소용돌이는 결국 철저한 후보 검증과 민주적 통제의 실패였다.

 이런 실수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대의민주주의는 비행기 승객들이 일정한 기간마다 승객들 중에서 기장을 선출하는 매우 위험한 제도라고 한다. 기장이 되려는 사람의 항로(철학과 비전)와 항법(정책공약)에 대한 면밀한 검증을 못 한다면 무능하고 무책임한 기장을 선출하게 되고, 일순간 추락하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보다 민주주의 수준이 높은 국가들의 공약 검증시스템은 시민사회, 학계, 언론, 중립적 정부기관, 연구단체 등 거미줄처럼 조밀하다. 미국의 비영리기관인 CRFB와 영국의 시민단체인 ‘Vote for Policies’ 등은 대학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후보들의 공약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일본은 언론과 비정부기구(NGO), 민간 연구소 등이 나서 다양한 방식으로 검증한다. 영국 공영방송 BBC, 독일 공영방송 ZDF, 캐나다 공영방송 CBC, 스웨덴 국영방송 STV 등은 다양한 연구기관과 협력하여 공약 검증에 최선을 다한다. 네덜란드 경제정책분석국(CPB)과 호주 의회예산처(PBO) 등 국가기관들도 공약 이행에 필요한 예산 분석을 해준다.

 국민들은 이번 대선을 통해 민주주의의 기본이 바로서길 바라고 있다. 이러한 민의가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당위적이고 선언적인 공약 제시로 그쳐서는 안 된다. 한정된 재원에 따른 효과적인 방안이 제시돼야 하며, 정책의 적실성과 이행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검증을 할 수 있고, 무책임한 공약 남발을 막을 수 있는 체계적인 검증 방안 마련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공약 검증 매뉴얼과 가이드북이 개발돼야 한다.

 이를 통해 언론, 시민사회, 연구기관 등은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공약 검증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 핵심공약과 우선순위, 재정계획에 대한 후보 간 차이점과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검증하는 매뉴얼이 개발되어야 한다. 각 후보자의 항로(철학과 비전)가 유권자와 정합성을 갖는지, 대선 후보들의 항법(정책공약)이 적실성과 실현가능성을 갖추고 있는지를 검증하는 방법이 담겨 있는 매뉴얼 제작이 시급하다.

 둘째, 선거 결과에만 초점을 맞춘 언론들의 경마식 보도와 가십거리인 서민 코스프레 등에 관심을 보였던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 언론들이 나서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부터 정책 경선이 되도록 견인하고, 선거일 30일 전까지 전체 공약과 재정계획 대차대조표가 담겨 있는 대선공약집 발표를 압박해야 한다. 특히, 평균 200∼300개 정도 되는 대선공약에 필요한 총 소요 예산과 재원조달 방안에 대한 실효성 검증에 나서야 한다.

 셋째, 구체적인 선거공약이 제시돼야 한다. 이를 통해 유권자가 부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문제점 해결 방안으로는 충분한지, 혜택은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돌아가는지를 각 기관이 적극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지역개발 공약과 국정 사업에 대한 재정 검증 또한 정밀하게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유권자의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영국의 유권자들은 정치인을 믿지 않기에 정책공약을 보고 선택한다고 한다. 공약은 정치인이 풀어놓는 선물보따리가 아니라 증세 등의 부담이 수반되는 사회적 약속일 수 있다는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이번 대선이야말로 나중에야 어찌 되든 공약 남발로 재미를 보겠다는 무책임한 대선 주자들을 걸러내는 선거가 되길 바란다. 나쁜 정책을 선택하는 것은 아이들의 미래를 핵전쟁보다 더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미국 유권자연맹의 경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
#최순실 국정농단#대의민주주의#선거공약#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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