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승헌]태극기가 구겨져도 강경화는 멀쩡한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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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과의 코드로 버티는 강경화 장관…집권 중후반 외교 난제 감당할 수 있나

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이쯤이면 여권에서도 책임론이 계속 나오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잠시 나오더니 들어갔다. 강원 산불이라는 초대형 이슈가 터졌다지만 예상보단 빨리 꺼졌다.

각종 외교 결례에 이어 이번엔 ‘구겨진 태극기’로 국제 행사를 치른 외교부의 수장 강경화 장관 얘기다.

“5·24조치 해제 검토”로 상징되는 강 장관의 설화(舌禍)와 외교부의 실수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강경화 리스트’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엔 태극기가 걸린 문제라서 좀 다르겠거니 했는데, 본격적인 책임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강 장관에겐 독특한 생존 비법, ‘강경화가 사는 법’이 있다고 봐야 한다. 대안 부재라든지, 새로 임명하면 또 다른 부실 검증 참사가 두렵다는 것 말고 본질적인 이유 말이다.

기자는 우연히 외교부 관계자를 통해 그 이유 중 하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강경화 외교부의 핵심이자 북핵 수석대표인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통해서다. 이 본부장은 4일 ‘문재인 정부와 한반도 평화 이니셔티브’ 국제학술회의에서 “(북-미) 대화가 재개될 때 ‘조기 수확(early harvest)’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조기 수확’이란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지난달 17일 언론에 꺼낸 개념으로 완전한 비핵화로 가기 전에 제재 완화 같은 성과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외교부 내 북핵 전문가들은 청와대가 ‘조기 수확’을 거론했을 때 내부적으로 뜨악해했다.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 전 제재 완화 불가를 외치는 미국의 반발이 뻔하기 때문. ‘조기 수확’은 2005∼2007년 6자회담 때 사용했던 개념이라 “과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미 공조에 도움이 안 된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럼에도 수시로 워싱턴을 드나드는 이 본부장이 어느새 ‘조기 수확론’ 전도사가 된 것이다.

이는 청와대와 부처 간 정상적 수준의 호흡을 넘어, 어떤 상황에서도 청와대와 신속하게 코드를 맞출 수 있음을 보여준 강경화 외교부의 상징적 장면 중 하나라고 기자는 생각한다. 앞서 강 장관이 지난달 21일 국회에서 “미국이 북한에 요구한 건 핵 폐기가 아니라 핵 동결” “북한과 미국, 한국의 비핵화 개념이 같다”며 듣는 이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는데, 이 관점에서 보면 왜 이런 말을 하고 다니는지 미스터리가 풀린다.

무엇보다 강 장관의 이런 스탠스는 자기 색깔이 없는 외교부 장관을 선호하는 문재인 청와대 입맛에 잘 맞는다. 일찍이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좌하며 윤영관 반기문 송민순 등 그 나름대로 ‘한가락’ 하는 외교부 장관을 지켜봤다. 다들 한미 관계를 놓고 한마디씩 했고 노 전 대통령이 얼마나 피곤해했는지 잘 안다. 문 대통령으로선 이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갈수록 코드를 잘 맞추는 강 장관을 구겨진 태극기나 외교 결례 정도로 경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가 언제까지 외교안보 이슈를 만기친람할 수 있을까. 집권 중반기를 넘어갈수록 외교 이슈는 더 많아진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각론을 다루는 경우다. 외교 전문가의 본격적인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때도 주파수가 맞는 ‘셀러브리티’형 외교부 장관으로 버틸 수 있을까. 외교부를 지금처럼 무슨 용역업체 비슷한 조직으로 두면 태극기 사태에서 보듯 기초 체력이 허약해지고, 나중엔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게 된다. 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뒤 진지하게 강 장관과 외교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한다. 마라톤 게임이 된 북핵 문제에 대처하는 것은 물론 문 대통령 자신을 위해서도 말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강경화#5·24조치 해제 검토#외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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