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영]“김정은 위원장, 고향 가게 해 주세요”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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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하노이 ‘빈손’ 회담 소식에 신은하 씨(32·여)는 힘이 빠졌다. 1998년 가족과 북한을 탈출해 중국-베트남-캄보디아-태국을 거쳐 2003년 서울에 정착한 그는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일요일 오후 11시 방영) 북-미 정상회담 특집을 위해 하노이를 찾아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했다. 행사장 주변을 바쁘게 오가는 그에게 어머니는 “곧 집에 갈 수 있게 되는 거냐”는 기대 어린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서울 생활 17년째지만 어머니에게 ‘집’은 여전히 부모의 산소가 있는 함경북도 무산이다. 허탈한 마음으로 귀국 짐을 싸는 그를 숙소인 호텔에서 만났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묵고 있는 멜리아 호텔과는 차로 20분 거리다.

―김 위원장과 사흘간 같은 도시에 있었네요.

“북한에서도 못 보던 사람을 이곳에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죠.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 평양에는 간 적이 없어요. 제게 김씨 일가는 별나라에 사는 딴 세상 사람이었어요.”

―김 위원장은 열차를 타고 중국을 종단해 하노이에 도착했어요. 은하 씨 가족이 목숨을 걸었던 탈북 루트이기도 하죠.

“사람들은 그가 하노이까지 66시간이나 걸렸다고 놀라지만 저는 고작 66시간밖에 안 되나 놀랐어요. 우리 가족은 하노이까지 오는 데 5년이 걸렸거든요. 눈을 피해 길이 아닌 곳으로 걷다 보니 구르고 넘어지고 늪에도 빠졌어요. 베트남 국경경비대에 붙잡혀 감옥에 가고 브로커에게 속아 돈만 털리기도 하고요.”

―김 위원장이 가까이 있고 북한 사람도 많은데 무섭진 않은가요.

“북한대사관을 지나칠 땐 소름이 돋았어요. 하지만 제겐 대한민국 여권이 있잖아요. ‘이 여권을 소지한 사람을 잘 보호해 달라’는 문구가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지금도 가장 고마운 게 여권이에요. 담배 한 보루 찔러준 적도 없는데 신청한 지 일주일 만에 나오는 여권이 정말 신기했어요.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정말 좋아해요.”

―김 위원장을 태운 차량을 향해 울면서 “고향 가게 해 주세요” 하고 외치는 모습이 외신에 보도돼 주목받았죠.

“마음이 복잡했어요. 돌이라도 던지고 싶고, 고향 사람이라 반갑기도 하고. 북한이야말로 ‘헬조선’이지만 탈북민들에겐 고향이잖아요. 김정은은 밉지만 그에게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

―16년 만에 다시 찾은 하노이, 많이 변했죠.

“오토바이밖에 없던 도로에 차가 많이 다녀요. 고층빌딩이 많은데 여기저기서 또 짓고 있어 활기가 느껴져요. 북한도 베트남처럼 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버지 때 먹은 소금, 자식 때 물 들이켠다’는 베트남 속담이 있다고 해요. 권력 분산과 개혁개방이냐, 폐쇄적인 세습체제냐, 같은 공산주의 국가임에도 선대의 다른 선택이 오늘의 활기찬 베트남과 가난한 북한을 만들었죠.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묻는 질문에 ‘내 자식들은 핵을 이고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죠. 전 이 뉴스를 보고 화가 났어요. 4대 세습을 생각하나 싶어서요.”

―독재자란 잠자리에 들 때 다음 날 깨어날 수 있을지 장담 못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어요. 세습이 아니면, 핵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정신적 ‘탈북’이 필요할 듯하네요.

“‘이밥에 고깃국, 그리고 비단옷’이라는 김일성의 꿈을 이뤄준다면, 그래서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얻는다면 핵이 없어도 발 뻗고 잘 수 있지 않을까요. 북한이 잘살고 자유롭게 고향에도 갈 수 있게 되면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받은 고통에 한해서는요.” ― 하노이에서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북미 정상회담#탈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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