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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용]‘레모네이드 꼬마’ 울린 무책임한 어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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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용]‘레모네이드 꼬마’ 울린 무책임한 어른들

박용 뉴욕 특파원 입력 2018-08-27 03:00수정 2018-08-27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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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뉴욕 특파원
미국에선 집 근처에서 레모네이드를 파는 아이들을 종종 본다. 용돈을 버는 경험을 스스로 해볼 수 있어 학교나 부모도 크게 말리진 않는다. 동네 어른들도 이런 뜻을 알기에 맛이 있건 없건 흔쾌히 사준다. 뉴욕주 볼스턴스파의 7세 꼬마 브렌던 멀베이니도 이런 ‘레모네이드 꼬마’였다.

브렌던은 지난달 집 앞에 레모네이드 가판을 차렸다. 75센트(약 840원)짜리 레모네이드를 팔아 꼭 가고 싶었던 디즈니랜드 여행비를 제 손으로 벌 생각이었다. 5세 때부터 매년 지역 축제에 나가 레모네이드를 판 경험을 살려 올해는 1달러짜리 생수와 빙수까지 메뉴에 추가했다. 그런데 이 충만한 사업가 정신 때문에 사달이 나고 말았다.

근처를 지나던 주 위생국 검사관은 주변 노점상인들의 민원을 이유로 브렌던의 ‘무허가’ 레모네이드 판매를 중단시켰다. 브렌던은 어린 나이에 정부 규제의 혹독함을 체험하고 가판을 접었다. 아버지 숀이 이 사연을 페이스북에 올리자 미국 전역에서 “국가가 아이들 레모네이드 판매까지 간섭하고 규제해서 되겠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엘리스 스테파니크 연방 하원의원은 “‘가혹한 규제’의 대표적 사례”라고 개탄했다.

앤드루 쿠오모 주지사는 브렌던의 가판 허가비 30달러를 대신 내주겠다는 성명을 냈다. 난처해진 위생국은 브렌던에게 사과하고 레모네이드만 판다면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물러섰다. 짐 테디스코 주 상원의원은 16세 미만이 판매하는 레모네이드 가판대는 주 위생국의 허가를 받지 않게 하는 ‘레모네이드 법안’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이 경직된 규제를 만들고 관리한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얘긴 하지 않았다.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구호를 본떠 만든 ‘레모네이드 가판대를 다시 위대하게’라는 정치 선전 구호까지 등장했다.

브렌던은 어른들의 호들갑 때문에 유명세를 탔지만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웠다. 18일(현지 시간) 새러토가 카운티 축제에서 레모네이드 가판대를 열어 946달러를 번 브렌던은 그 돈을 꼭 가고 싶었던 디즈니랜드 여행 대신 더 값진 데 쓰기로 했다. 성장 장애로 다리가 휘는 병을 앓고 있는 12세 매디 무어의 치료비에 보탰다. 뉴욕타임스(NYT)는 “브렌던은 내년에 다시 사업에 도전할 것”이라며 “이번에는 레모네이드만 팔 계획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국가가 시민 사생활에 깊숙이 개입해 규제하는 ‘보모국가(Nanny state)’ 논쟁을 촉발시킨 브렌던 사례는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영국 유럽 등 사회복지 선진국일수록 논란이 뜨겁다. ‘규제 강국’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에 따르면 20대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1만3704건의 법안 중 2391건이 규제 법안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에서 제정되는 법률의 약 90%가 의원발의 법안인데도 모범규제 의제는 국회에서 제한적으로 다뤄지거나 전혀 다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의원 입법도 정부 입법처럼 엄격한 규제 심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늘 나오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15년 소상공인의 매출 대비 규제 비용 비율은 11.2%로, 중견기업의 약 5배다. 정치권이 최저임금 인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영업자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의지가 있다면 대기업, 카드 수수료, 임대료 등 남 탓만 할 게 아니다. 당장이라도 직접 할 수 있는 의원 입법 규제 심사 논의부터 시작하는 게 도리다. 대통령은 규제 개혁을 외치고, 국회는 열심히 규제를 만들어 내는 보모국가의 ‘정치 코미디’는 이제 끝낼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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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


#오늘과 내일#레모네이드 꼬마#보모국가#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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