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승헌]김병준과 델라웨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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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후기 인상파 비슷한 화풍(畵風)이었던 것 같다.

2003년 1월 어느 일요일 밤. 서울 종로구에 있는 김병준 당시 노무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정무분과 간사 자택을 찾았더니 한가운데 그림이 있었다. 밝은 집안 분위기랑 닮은 풍경화였다. “제가 그림을 좀 좋아합니다. 풍경화든 인물화든…. 훌륭한 그림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거든요.” 진보라고 집에 민중예술가 작품이 있으라는 법은 없지만 지역주의 타파와 지방분권 정치개혁을 내건 노 전 대통령 ‘정책 멘토’의 집에서 느껴지는 다른 친노들과의 이질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는 노 전 대통령에게 줄곧 정책을 조언했지만 친노 핵심과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노무현 정부 후 교수(국민대 행정대학원)로 돌아온 김병준은 공·사석에서 종종 델라웨어 이야기를 했다. 미국 50개 주 중 하나이자 자신이 박사학위를 받은 대학이 있는 주다. 주로 지방분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델라웨어에 있는 세계적 화학기업인 듀폰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야기했다.

기자에겐 김병준과 델라웨어는 좀 다른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다. 오히려 오래전 그의 집에서 봤던 그림과 오버랩된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종종 지나치거나 들렀던 델라웨어는 ‘미국 사람들도 어디 붙어 있는지 잘 모르는’ 곳이었다. 실제로 50개 주 중 면적이 두 번째로 작은 데다, 뉴저지 메릴랜드 펜실베이니아 등 대형 주에 둘러싸여 있다. 부가세 등이 없어 기업의 천국이고, 해외 직구족을 위한 배달대행지라는 차별화되는 콘텐츠와 경쟁력이 있는데도 정작 존재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질적이고, 존재감도 별로라는 것이다.

김병준이 지난달 난파 직전의 자유한국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을 맡자 당 안팎에선 “노무현 신봉자가 무슨 한국당을 맡느냐” “얼마나 버티나 보자”는 식의 비아냥이 많았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대놓고 “김병준의 노무현식 개혁은 안 된다”고 비판했다. 취임하자마자 접대 골프 논란에 휩싸이면서 이런 말들은 더 퍼졌다. 기자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김병준이 진짜로 델라웨어 짝이 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김병준이 한국당을 맡은 지 보름 정도 지나면서 ‘국가주의’ 이슈를 점화시키고 전임 홍준표 전 대표와는 차별화되는 언어를 구사하면서 이런 말들은 차츰 잦아들고 있는 듯하다. 중견 행정학자의 인사이트와 집권 세력 핵심에 있었던 경험이 무시하기 어려운 시너지를 내고 있다는 평가도 들린다. 물론 김병준호의 성공은 단정하긴 이르다. 정기국회는 시작도 안 했고 이념 논쟁 말고 구체적인 정책 대결은 판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전히 야당 사정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김병준이 지금보다 좀 더 치열하게 투쟁하고 주인의식을 가지면서 존재감을 드러냈으면 좋겠다고들 한다. 잠시 머물다 떠날 ‘이방인’일지라도 있는 동안만큼은 교수 출신 멘토나 조언자에서 벗어나 당의 주인이라 여기면서 휘젓고 다니라는 얘기다. 한 보수 원로 인사는 “한국당이 그 전신인 한나라당 시절부터 외부 출신 비대위원장이 성공한 적이 없다. 주인의식 없이 떠돌다가 하나 마나 한 말만 하고 떠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협치를 위해서는 좋든 싫든 김병준이 실패하지 않는 게 한국당은 물론 문재인 정부를 위해서도 좋다. 나중에 부딪치다 사라지더라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게 김병준이 말하는 또 다른 ‘노무현 정신’이기도 할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김병준#델라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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