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광장’의 이명준이 2018년에 살았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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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논설위원
이기홍 논설위원
23일 타계한 한국 문학의 거목 최인훈의 1960년작 ‘광장’에서 주인공인 철학과 대학생 이명준은 월북자 아버지가 대남방송에 나왔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구타당한다. 남한에 환멸을 느낀 그는 코뮤니즘 이상사회를 찾아 월북하지만 북한은 혁명은 없고 혁명의 화석만 남아있는 사회였다. 6·25전쟁에서 포로가 된 그는 중립국행을 택한다.

대학시절 이명준을 소재로 많은 토론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남과 북 어느 쪽에도 마음을 둘 수 없었던 이명준 처럼 1980년대 대학가에도 회색인이 많았다. 군사독재 치하에서 학생운동에 뛰어든 학생들 가운데는 2, 3학년에 접어들면서 운동권 지도부에 대해서도 회의를 느끼게 되는 이들이 많았다.

수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가 불가피한 교조주의적 폭력혁명 노선 앞에서 많은 학생들이 ‘이 길 밖에 없는가’를 고민하고 배척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운동권을 떠난 학생들은 군사독재라는 현실을 용납할 수도, 혁명전사(戰士)가 될 수도 없는 회색인 상태로 떠돌았다.

그러다 결국 1987년 NL지도부가 직선제 쟁취를 내걸며 온건 노선으로 돌아서자, 떠났던 학생들도 다시 시위 대열에 동참했고, 6월 항쟁의 성공으로 젊은이들이 마음 둘 ‘준거집단’ 없이 방황해야하는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좌우 극단의 소수를 제외하면 진보든 보수든, 어느 쪽이어도 선악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상대성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최순실 사태는 상당수 사람들을 다시 회색인으로 만들었다. ‘보수’라 칭할 자격도 없는 오른쪽 극단 세력들이 권력 핵심부에서 국정을 유린한 실태가 드러나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발전을 중시하는 건전한 보수주의를 지향했던 이들은 더 이상 마음 줄 곳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보수는 민주 법치 인권 복지와 배치되는 개념이 아닌데, 그런 핵심 가치들을 전혀 체화하지 못한, 독재시절부터 기득권을 누려온 인사들이 넘쳐나는 자유한국당을 더 이상 지지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여론조사 무응답층, 지방선거 전날까지도 40% 이상에 달했던 부동층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보수야당을 수술할 혁신비상대책위원장으로 균형감각과 통찰력을 지녔다는 평을 받아온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가 선정됐다는 소식에 많은 회색인은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 비대위원장이 지난해 KLPGA 골프대회 프로암 초청을 받아 라운딩을 했다는 소식에 가슴 한구석에 찬바람이 도는 느낌을 받은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법적·윤리적으로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사안이라 해도, 그 역시 ‘구름위의 잘 나가는 멤버’였구나라는 인상을 준건 사실이다.

‘반(反)헌법행위자 열전’을 만들고 있는 좌파 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22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우리 보수는 사회에 대한 책임보다 사익을 취하기 위해 힘센 놈을 쫓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며 역사적으로 공동체를 위해 책임질 보수, 보수의 가치를 지킨 인물로 초대 부통령 이시영, 2대 부통령 김성수, 김영삼 전 대통령 등 세 명을 꼽았다. 보수 집권 기간이 60년 가까이 되는데 보수주의자로 인정될 만한 이는 그렇게 드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진영은 회색인들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준을 보여주고 있을까. 집권세력이 정책과 역사관에서 드러내는 낡은 이데올로기적 그림자는 논외로 쳐도, 그나마 때묻지 않은 인물로 여겼던 인사들 마저 검증의 현미경 위에 올라가면 추레한 면모가 드러나고 만다. 노동·인권변호사 출신인 김선수 대법관 후보자는 서초동 아파트 다운계약서를 문제삼는 질문에 2000년 당시의 관행이라고 서면 답변했다. 공인중개사 3명에게 필자가 물어봤다. 다운계약서 관행이 있었던 건 맞지만, 당시에도 탈세를 돕는 행위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매도자가 양도소득세 면제 대상인 경우의 다운계약은 매수자가 취득세를 기준시가를 기준으로 내기 위해 등기소에 제출할 계약서를 별도로 만드는 흔한 관행이었지만, 매도자의 양도소득세를 줄여주기 위한 다운계약은 탈세행위를 돕는 것이어서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계약서 명기 금액 초과분은 현찰로 수천만 원을 배낭에 담아와 건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김 후보자는 청와대 비서관 퇴임 후 2년간 기술보증기금에서 비상임 이사를 지내며 6088만 원을 받고, 이 기금에서 자금을 지원받은 업체의 감사를 겸직하며 주식 1932주를 가진 것에 대해서도 “선임 과정이 기억나지 않는다” “경영에 관여하지 않아 기금 지원 업체라는 걸 몰랐다”고 답변했다. 그런 답변 대신 “대법관 후보로서 참으로 부끄럽다. 뼈저리게 뉘우친다”고 했다면 그래도 일반인과 다른 높은 윤리의식이 돋보였을 것이다. 하기야 약자의 편을 자임했던 이들 역시 ‘구름위의 멤버’였음을 깨닫고 실망하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닐 것이다.

이명준이 2018년 광화문광장에 서면 어떤 생각을 할까.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의 뒷머리 난간에 기대 우두커니 갑판을 바라보며, 소학교 때 교사(校舍) 담벼락에 기대어 햇볕을 쬐던 시간을 떠올릴 때 처럼 혼자만의 밀실로 침잠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오늘과 내일#광장#이명준#회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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