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부형권]운전대는 없고, 지렛대는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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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국제부장
부형권 국제부장
중국의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에 깡패 2명이 탄다. 이들은 승객의 돈을 빼앗고 젊은 여성 운전기사를 끌어내 성폭행까지 한다. 버스 안에 40여 명의 손님이 있었지만 젊은 남자 1명만 따라 내려 저항하다 흉기에 찔린다. 못된 짓을 한 깡패들은 달아나고 여성 기사는 버스로 돌아와 승객들을 원망스럽게 쳐다본다. 기사는 부상당한 남자 승객을 버스에 다시 태워주지 않는다. 남자는 “유일하게 당신을 도와줬는데 왜 이러느냐”고 항의하지만 버스는 매몰차게 떠난다. 그 이유는 곧 밝혀진다. 버스는 낭떠러지 아래에서 발견된다. 실화를 토대로 제작된 중국 단편영화 ‘44번 버스’(2001년 개봉) 이야기.

오래된 이 영화를 떠올리게 해준 건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을 비난한 북한 노동신문(20일자) 논평(‘주제 넘는 허욕과 편견에 사로잡히면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다’). “원래 운전자라고 하면 차를 몰아갈 도로를 선택하고, 운전 방향과 속도 등을 스스로 판단하고 조절해 나가는 사람을 말한다. 남조선이 이쪽에 아부하면 저쪽이 반발하고 저쪽에 굴종하면 이쪽이 어깃장을 놓은 악순환 속에서 운전자는커녕 조수 노릇도 변변히 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이치다. 남조선 당국의 행태가 얼마나 답답하고 민망스러웠으면 서방 언론들까지 ‘운전자론이 아닌 방관자론’이라고 조소하고 있겠는가.”

예전 같으면 ‘불량국가의 헛소리’로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요즘은 ‘한국 대기업의 2, 3세 경영자들보다 낫고, 백성의 생활을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도자의 나라에서 하는 말이니 허투루 들을 일이 아닌 듯하다.

영화 속 여성이 기사가 아니고, 승객 중 한 명이었다면 저토록 충격적인 반전(反轉)이 가능했을까. 비겁했던 승객들은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리지도 못하고, 뒤늦은 후회를 하며 아찔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반대로 한반도의 복잡미묘한 정세 속에서 이해 당사국들이 하나의 버스에 올라타 한 명의 지도자나 하나의 나라에 운전대를 맡기는 상황이 있을 수 있을까. 상상이 안 된다. 따지고 보면 정부의 운전자론도 우리의 안전과 운명을 그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다른 표현 아닌가.

한반도 비핵화 게임은 운전대 싸움이 아니다. 상대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끝없는 지렛대 대결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북한으로부터 원하는 걸 얻어내는 지렛대로 맘껏 활용했다. 북한은 회담 성사를 위해 억류 미국인 3명을 풀어주고, 풍계리 핵 실험장을 폐쇄하는 등 성심성의를 다했다. 그러나 회담 직후 지렛대 구도가 바뀌었다. 노동신문 표현을 빌리면 ‘조-미(북-미) 적대관계를 일시에 불식시킨’ 김정은은 느긋하고, ‘회담의 패배자’로 비판받은 트럼프는 초조하다. 적잖은 전문가들이 “이 회담을 통해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은 셈”이라고 우려한다. 사실 핵은 북한의 최고 지렛대다. 그게 아니라면 왜 김정은을 만나겠나.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외교적 군사적 경제적 지렛대들은 원래 어마어마하다. 소외돼 있는 일본도 비핵화 비용 논의가 본격화하면 ‘돈’이란 단골 지렛대를 들이댈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지렛대는?

지렛대는 정확한 받침점을 잘 찾으면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릴 수 있는 도구다. 병따개처럼. 운전대 싸움보다 지렛대 대결이 그나마 해볼 만한 이유다.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뜻과 달리 운전되지 않도록, 소소하더라도 확실한 지렛대들을 잘 챙겨놓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부형권 국제부장 bookum90@donga.com
#문재인 정부#비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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