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승헌]일주일만 꾹 참으면 안 될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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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조금이라도 빨리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마이크 앞에 서기도 전에, 지정된 자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입을 열었다. 보무도 당당했다. 두 팔을 위아래로 휘휘 젓기도 했다.

1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으로 찾아온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을 만난 뒤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공식 확인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들떠 보였다. 종전선언, 주한미군 등 트럼프에게서 최근 듣기 어려운 분야의 말들이 쏟아졌다. 김영철이 전한 김정은의 친서와 메시지에 만족하는 듯했다. 오죽하면 기자들과 이런 대화도 오갔다.

―12일 싱가포르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나.

“(중략) 김정은의 편지는 아주 좋은 편지였다. 보고 싶나?”

―편지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

“얼마나 알고 싶은데, 얼마나, 얼마나(how much)?”

이 판은 온전히 트럼프 자신의 판이라는 자부심이 뚝뚝 묻어난다. 그동안 외교 전문가들이 ‘장사꾼’이라며 얼마나 비하했던가. 하지만 전직 미 대통령 누구도 해내지 못한 북-미 정상회담 개최 목전까지 갔다. 트럼프가 “역대 정권에서 이미 했었어야 하는 일인데, 이걸 내가 (수습)하고 있다”는 대목에선 역사적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트럼프가 어느 때보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북-미 정상회담, 특히 종전선언을 거론하자 청와대는 화색이 돌았다. 그러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8일 미리 지방선거 사전투표에 나선다고 밝혔다. 투표 독려 차원이라지만 누구나 싱가포르행을 대비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한미 관계, 북-미 협상 과정을 지켜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청와대의 이런 행보에 불안해하고 있다. 어찌 됐든 트럼프가 판을 깐 싱가포르 회담을 앞두고 문 대통령이 ‘숟가락’을 얹으려다가 자칫 판 자체가 엎어질까 봐서다. 물론 취소됐다 어렵사리 부활한 북-미 회담인 만큼 어떤 식으로든 종전선언의 틀이라도 잡으려는 문 대통령의 ‘진심’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북-미 정상은 지금 목을 내걸고 게임을 벌이고 있다. 우리 사정이나 문 대통령의 선의(善意)는 부차적인 문제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북-미 비핵화 논의는 아직도 판문점에서 진행 중이다. 12일 직전까지 진행될 듯하다. 개성공단 재개든, 이산가족 상봉이든, 심지어 경평 축구든 북-미 비핵화 논의가 어그러지면 모두 없던 일이 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종전선언은 말할 것도 없다.

종전선언을 위해 청와대 안팎에서 문 대통령의 싱가포르행 가능성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고, 올해 초 넘실댔다가 허망하게 사라진 ‘고르디우스의 매듭론’이 떠오른다. 한반도에 대화 기운이 완연하자 청와대 관계자가 “복잡하게 얽힌 북핵 실타래를 정상들이 만나 한꺼번에 풀자”며 꺼낸 개념이었다. 하지만 ‘단계적 비핵화’라는 김정은의 한마디에 물거품이 됐다.

싱가포르 회담까지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지만 북-미 두 정상의 스타일을 감안하면 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트럼프는 회담을 취소했다가 하루 만에 뒤집었고, 김정은은 외교 관례를 무시하고 하루 전날 문 대통령에게 ‘정상회담 번개’를 쳐서 성사시켰다.

북-미 비핵화 논의가 성공해야 종전선언도 있다. 트럼프의 오케이 사인이 있어야 싱가포르에 갈 수 있다는 건 청와대도 잘 안다. 하지만 의욕과 기대가 넘쳐 자제가 잘 안 된다. 첫 만남을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울 트럼프와 김정은을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시그널은 감추는 프로페셔널한 외교력이 아쉽다. 문 대통령이 연초 말했던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은 이럴 때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훈수를 두고 싶어도 이럴 땐 꾹 참는 게 서로에게 모두 좋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김영철#트럼프#북미 정상회담#싱가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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