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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김광현]임도 보고 뽕도 따는 근로시간 단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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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김광현]임도 보고 뽕도 따는 근로시간 단축은 없다

김광현 논설위원 입력 2018-05-24 03:00수정 2018-05-2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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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논설위원
며칠 전에 중학교 1학년 딸아이가 한국은 세계에서 몇 번째로 잘사는 나라냐고 물었다. 11위(국내총생산 기준)쯤 된다고 했더니 그렇게 높은 줄 몰랐다면서 어떻게 해서 잘살게 됐냐고 되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약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국가발전전략이니 지도자가 어떠니 설명해 봐야 못 알아들을 것 같기도 해서, 우리나라 학생이 세계에서 공부를 제일 많이 했고 근로자들이 일을 제일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게 이제는 한국이 세계 최장 근로시간 국가라는 오명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장시간 노동에 브레이크를 밟을 때가 됐다는 사회적 공감대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거창하게 말하면 산업혁명 이후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는 근로시간 단축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올해 1월 주당 법정근로시간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한꺼번에 단축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 통과를 두고 노동계 출신인 홍영표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이 현실에서 안착하는 길은 첩첩산중이다. 요즘 삐걱거리는 최저임금 인상 추진 과정과 너무 비슷하다. 둘 다 가장 강력한 수위로 일단 저질렀다. 당장 생기는 부작용은 나랏돈으로 땜질 처방한다. 그래도 문제가 있으면 그때 가서 차후 보완조치를 한다는 프로세스가 서로 닮은꼴이다.

최저임금 인상 속도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근로시간 단축 개정안 가운데 연장근로시간, 탄력근로제 등 몇 개 조항은 미국 일본 독일 수준을 넘을 정도로 엄격하다. 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는 연장근로시간 상한 자체가 없거나 노사가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돼 있다. 구글 등 실리콘밸리 기업의 사무실에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다. 앞으로 한국에서 특별한 사정이 생겨 몇 달 늦게까지 일을 시키고 대신 일 끝나고 그만큼 쉬라고 했다가는 경영자가 감옥에 가는 수가 있다.

땜질 처방도 비슷하다. 지난주 정부가 근로시간 단축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일자리 함께하기 지원사업’이란 명목으로 2022년까지 4700억 원의 기금을 투입하기로 했다. 최저임금 부작용 처방용 ‘일자리 안정자금’과 유사하다. 개선방안으로 탄력근로제에 대해 2022년까지 운용해 본 다음 찾겠다고 개정안에 정해 두었다. 요즘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조정하느라 부산을 떠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보완책을 마련할 거라면 늦지 않아야 한다.

일과 삶을 균형 있게 누리겠다는 이른바 ‘워라밸’을 선호하는 직장인들도 대다수는 차라리 돈을 좀 적게 받더라도 내 시간을 많이 갖자는 것이지, 월급은 월급대로 받으면서 일은 적게 하자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최근 한국노총은 각 단위 노조에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해 줄어드는 수당을 임금으로 보전받을 수 있도록 노사 협상을 진행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민노총 역시 ‘임금 삭감 없는 근로시간 단축’이 올 하투(夏鬪)에서 제시한 주요 가이드라인 중 하나다. 임도 보고 뽕도 딸 수 있는 묘수로 찾은 게 투쟁이라면 전체적으로 잃는 게 더 많을 것이다.

수십 년간 숨 가쁘게 달려온 초고속 성장은 성과와 함께 그늘도 드리웠다. 이제 시대에 맞게 방향 전환 혹은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어차피 장기 저성장 시대에 대비해야 할 때다. 그래도 그 방법이 급회전이나 급정거가 돼서는 안 된다. 국민들을 냉탕 온탕의 실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근로시간 단축#최저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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