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서영아]너무나 가볍게 쓰이는 ‘패싱’이란 표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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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아 도쿄 특파원
서영아 도쿄 특파원
일본 언론이 남북 정상회담(4월 27일)을 보도하며 가장 궁금해한 것은 “(회담에서) 납치 문제가 거론됐느냐”였다. 물론 이들도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이 회담에서 납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일본만 모기장 밖에 있다”는 지적이 따가운 가운데 납치 외에 일본의 존재감을 확인할 대목이 없었다. 그래서 이틀 뒤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메시지를 전해오자 아베 신조 총리는 즉석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이를 발표할 정도로 반색했다.

‘일본 배제’에 대한 초조감은 이 정도 선에서 멈춘 것 같다. 대북 접촉에 대해서는 6월에 열린다는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지켜본 뒤 움직이면 된다는 의견이 대세다. ‘(북한에 대한) 최대한의 압박과 제재’를 강조해온 노선에서 갑작스러운 선회가 쉽지 않은 데다, 대북 협상에서 실망을 거듭해온 경험도 작동했다. ‘관계국들이 북한에 언제까지 속을지 지켜보자’는 심산도 깔려 있는 걸로 보인다.

물론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미 수교가 의제가 된다면 일본도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를 검토할 것이다. 일본에 북-일 수교는 마무리하지 못한 숙제와 같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전격 방북해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과 북-일 수교 협상 재개 등을 담은 ‘평양선언’을 발표했지만 납치 문제에 걸려 좌초했다. 2014년 아베 정권과 북한이 납치문제 재조사를 약속한 ‘스톡홀름 합의’도 결국 흐지부지됐다.

다시 북-일 교섭이 이뤄진다면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북한이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로 100억∼200억 달러의 경제지원을 기대한다는 얘기들도 나오지만, 현지 분위기는 대북 지원을 논하기엔 이른 감이 있다. “일본이 핵개발의 현금지급기가 돼야 하느냐”며 부정적 기류가 벌써부터 형성되고 있다.

더 큰 고민은 아베 총리가 외쳐온 ‘납치문제 해결’이 실제 가능하냐는 점이다. 그로서는 명분상 이 문제의 진전이 없으면 김정은과 마주 앉기 어렵다. 여론이 납치문제에 대해 맹목적일 정도로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이를 조장하고 이용하며 인기 관리를 해왔다.

일본이 원하는 ‘해결’은 쉽지 않아 보인다. 북한은 일본 정부가 인증한 납치 피해자 12명 중 “8명은 사망, 4명은 입국한 적이 없다”며 “납치 문제는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중에서도 상징적 존재인 요코타 메구미 씨의 경우 사석에서 만나는 일본 언론인 대부분은 북한 주장대로 사망했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가족의 비통함을 생각해서도,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여론 때문에도 아무도 기사로 쓰지 못한다.

겉만 보면 이런 일본이 답답해 보이기도 한다. 북한은 “(일본이) 제재니 압박이니 하다가는 억년 가도 우리의 신성한 땅을 밟지 못할 것”(6일자 노동신문)이라고 ‘패싱’ 위협을 했다. 적당한 시기에 특이한 정치인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됐고 한국에는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정권이 들어섰다는 점은 북한에 행운이다. 남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의 성격을 잘 이용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행운이 이어진다고 해서 마치 남북한이 세계를, 트럼프 대통령을 움직이는 것처럼 자만해서는 안 된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 탓에 한반도의 운명은 주변국들의 욕망과 간섭에 희롱당해 왔다. 앞으로도 무수한 난관이 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이웃국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를 일이다. 또 설사 도움까지는 아니어도 장애라도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을 되게는 못해도 안 되게 할 수 있는 존재는 도처에 널려 있다. 그게 세상사다.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남북 정상회담#납치 문제#김정은#일본 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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