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부형권]평양 세 번에, 판문점 한 번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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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국제부장
부형권 국제부장
미국 대도시 아파트 펜트하우스에 사는 한 부잣집 이야기. 다른 지역 유명 사립대에 다니는 아들이 엄마 생신을 까먹었다. 저녁이 다 돼도 축하 전화 한 통이 없었다. 화가 난 아빠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아들아, 이젠 더 이상 부모가 필요 없는 모양이구나.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로부터 몇 초 만에 “엄마, 진심으로 생신 축하드려요. 선물은 주말에 집에 가서 드릴게요. 늦어서 죄송해요”라는 아들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의 경고 메시지는 ‘너(아들)의 걱정 없는 삶이 누구 덕분에 가능한지’를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는 “부모 자식 간에도 그 나름의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친구든, 선후배든, 그냥 아는 사이든 서로 주고받을 게 있어야 그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는 경향이 짙다.

나라 간 ‘기브 앤드 테이크’는 좀 더 엄격하고, 때론 살벌하다. 상호주의(reciprocity)는 외교의 기본 원리다. 최근 아프리카 국가로 부임한 한국의 A 대사는 아그레망(주재국 임명동의)을 받는 데 두 달 반이나 걸렸다고 했다. “지난해 서울에 부임한 그 나라의 주한 대사 아그레망이 탄핵 사태 영향으로 늦게 처리된 모양이더라.” 그 기간을 정확히 맞추더란다.

독일 통일 과정에도 그 나름의 상호주의가 있었다. 1987년 9월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이 동독 국가원수 최초로 서독의 본 방문을 추진했을 때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는 반대했다. 호네커와 함께 의장대 사열을 하고, 서독 총리 관저 앞에 동독기가 게양되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동서독 간 인적 교류 확대’를 위해 호네커의 방문을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조건을 내걸었다. “양 지도부의 연설이 동서독 국민에게 생중계돼야 한다.” 동독 측은 “방문을 포기하면 했지, 그건(생중계는) 안 된다”고 맞섰다. 서독도 “생중계가 안 되면 이번 방문은 의미 없다”며 후퇴하지 않았다. 결국 생중계는 허용됐고, “독일인은 분단으로, 장벽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콜의 연설은 동독 주민 안방에 전달됐다.

‘4·27 남북 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의 감동과 감격이 조금씩 잦아들면서 ‘남북 간엔 어떤 수준의 상호주의가 작동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슬며시 찾아들었다.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설명자료를 보면 ‘분단 이후 북한 최고지도자의 첫 우리 측 지역(판문점) 방문 성사’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회담을 우리 측 지역에서 개최한 만큼 차기 회담은 올해 가을 평양에서 개최하는 데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상호주의에 입각한다면 이번 회담을 판문점 남측 ‘평화의집’에서 했으면, 다음 회담은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하는 게 일반적이다. 2000년, 2007년 1, 2차 정상회담 모두 평양에서 했고, 북한의 ‘서울 답방’ 약속은 아직 지켜지지 않았다.

이번에 ‘남북 당국자 상주 공동연락사무소의 개성지역 설치’도 합의됐다. 연락사무소를 북측 개성에 하나 두면, 남측 파주쯤에도 하나 개설하는 게 상호주의에 부합한다. 이런 얘기를 하면 정부 관계자들은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고 늘 대꾸한다.

세계는 판문점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 국가화 의지를 지켜봤다. 그 정상화를 제대로 도우려면 남북 간 상호주의가 ‘평양 세 번에, 판문점 한 번’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되지 않을까. 지금 남북 상황이 특수해서 그럴 수밖에 없다면 ‘이 특별 대우가 누구 덕분에 가능한지’라도 분명히 각인시켜야 한다. 그래야 이 좋은 관계가 원만히 오래갈 수 있다.
 
부형권 국제부장 bookum90@donga.com
#남북 정상회담#판문점 선언#상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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