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영]칼을 든 트럼프, 펜을 쥔 베이조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9일 03시 00분


코멘트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바로 뉴욕으로 날아갔다. 아사히신문과 껄끄러웠던 아베 총리는 두 사람 모두 신문에 얻어맞았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농담을 건넸다. 둘은 “하지만 내가 이겼다” “나도 이겼다”고 맞장구치며 금방 친해졌다.

그로부터 1년 4개월이 지난 요즘 아베 총리는 아사히의 사학 스캔들 특종 보도 후 촛불 시위대의 퇴진 압력을 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대선 때 러시아와 내통했다는 언론 보도로 특검 수사를 받는 처지다. 아마존을 공격하는 트럼프를 보며 사람들은 워싱턴포스트(WP)에 뺨 맞고 아마존에 눈 흘기기라고 한다. 아마존의 최고경영자 제프 베이조스가 WP의 소유자다.

트럼프와 베이조스는 이민자 가정(독일, 쿠바) 출신으로 아이비리그(펜실베이니아대, 프린스턴대)를 나와 자수성가한 부자라는 공통점을 빼면 상극이다. 트럼프는 벽돌과 시멘트로 돈을 벌고 쇠락해가는 제조업계에서 표밭을 일군 정치인이다. 인터넷 쇼핑은 할 줄 모른다. 베이조스는 미국 최대 인터넷 상거래업체로 돈을 벌어 우주 개발에 쏟아붓는 실리콘밸리 엘리트다. 트럼프의 아마존 때리기는 실리콘밸리의 기술 혁신으로 일자리를 잃은 핵심 지지층 다독이기다.

올드보이 트럼프 대통령의 무기는 뉴미디어인 트위터다. 그는 ‘가짜 뉴스 쏟아내는’ 주류 언론을 패스해 트위터로 유권자와 직통한다. WP가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를 내면 “아마존이 미국 우체국을 배달 소년처럼 부린다” “아마존의 횡포로 소매점들이 문을 닫고 있다”는 보복성 말폭탄을 던진다.

트럼프의 트위터 속도전에 맞서는 베이조스의 무기는 올드미디어인 신문이다. 권력 감시란 인터넷의 속도감과 조급증으론 해낼 수 없는 일. WP는 대선 당시 기자 20명을 투입해 트럼프 검증팀을 꾸렸는데 팀장이 1972년 워터게이트 스캔들 보도로 닉슨 대통령을 끌어내린 탐사보도의 전설 밥 우드워드였다. 검증팀은 트럼프 후보의 후원금 기부 약속 미이행, 음담패설 녹음파일을 특종 보도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후 ‘대통령의 실세 사위가 러시아 커넥션의 몸통’이라는 의혹을 제기한 것도 WP다. 트럼프가 “WP는 베이조스의 장난감”이라는 트윗을 날리자 WP는 “베이조스는 격주 수요일마다 간부 회의를 주재하지만 신문 편집엔 관여하지 않는다”며 아마존 독주의 폐해 등 그동안 WP가 보도했던 아마존 비판 기사의 목록을 편집권 독립의 증거로 제시했다.

트럼프와 WP의 불화는 1972년 재선을 앞두고 워터게이트빌딩 민주당사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닉슨 정부와 이를 폭로한 WP의 전쟁과 닮은꼴이다. 두 스캔들 모두 선거 방해가 핵심이다. 트럼프가 아마존을 협박하듯 닉슨도 WP 소유의 방송사 면허 취소 카드를 꺼내 들었다. WP는 느리지만 정확한 보도로 맞섰다. 취재 내용을 2명 이상의 다른 취재원에게 복수로 확인하기(삼각확인·triangulation)와 같은 보도 원칙은 이때 다듬어진 것이다.

트럼프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이고, 베이조스는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이다. 트럼프의 아마존 때리기를 포브스 집계 세계 부호 1위에 대한 질투심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트럼프는 766위다. 잃을 게 많은 베이조스가 트럼프의 칼 앞에서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펜을 지켜낼 수 있을까. 뉴스위크는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된다면 그건 특검도 의회도 아닌 탐사보도의 힘이라고 논평했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도널드 트럼프#아베 신조 일본 총리#사학 스캔들#촛불 시위#퇴진 압력#아마존#제프 베이조스#트위터#wp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