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주한미군 철수는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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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父子 “주둔도, 훈련도 인정”… 비공개 귓속말엔 진정성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우리 특사단의 방북 결과 발표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대목은 김정은이 4월 초 실시되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에 대해 ‘이해한다’는 뜻을 밝혔다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전언이었다. 정 실장이 읽은 발표문에는 포함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북한 매체의 카메라에 찍힌 정 실장의 수첩에 ‘연합훈련으로 남북 관계가 단절되는 일은 없어야…’라고 적힌 메모를 두고 김정은의 대남 협박 발언을 받아쓴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자 해명하면서 나온 이야기다.

이 메모는 혹시라도 북측이 한미 연합 훈련에 문제를 제기할 것에 대비해 우리 측 대응논리를 적어놓은 일종의 ‘커닝 페이퍼’였고, 오히려 김정은은 연합훈련을 용인한다는 전향적 태도를 보였다는 게 정 실장의 설명이었다. 그 메모가 노출되지 않았으면 김정은의 발언은 공개되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발언이 전해지면서 ‘4월 한반도 위기 재연’ 걱정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김정일이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대중(DJ) 대통령에게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도 동의했던 점에 비춰보면 그리 놀랄 만한 발언은 아니다. 김정일은 DJ에게 “제가 비밀사항을 말씀드리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1992년 초에 김용순 비서를 미국에 특사로 보내 ‘남과 북이 싸움 안 하기로 했다. 그러니 미군이 계속 남아서 남과 북이 전쟁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했댔습니다.”


김일성 생전인 1991년 말 남북 기본합의서에 합의한 직후 미국에 관계 개선 메시지를 전하며 ‘미군이 계속 주둔하되 북한에 적대적인 군대가 아니라 평화유지군 같은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북한 매체에선 계속 미군 철수를 주장하느냐는 DJ의 질문에 김정일은 “우리 인민들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것이니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답했다고 한다.(임동원 ‘피스메이커’)

김정일은 DJ에게 이런 뜻을 미국에 전해달라고 부탁했고, 이는 뒤이은 ‘북-미 코뮈니케’ 합의와 특사 교환, 성사 직전까지 갔던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계획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사실 김정일의 말은 국제정치학적 현실주의에 따른 흠잡을 데 없는 논리적 결론이기도 했다. 주한미군은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보여주는 존재다. 하지만 공동의 위협인 북한과의 적대관계가 청산되면 한미동맹의 의의도, 주한미군의 역할도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북한은 한 발짝 더 나가 미국의 민감한 전략적 포인트까지 건드렸다. 다가올 미국과 중국 간 패권경쟁의 한복판에 선 북한의 역할을 가늠해 보라며 상상력까지 자극한 것이다. 이번에 김정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메시지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헨리 키신저가 진단한 대로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트럼프 대통령이라면 뭔가 대단한 결과를 낼 엄청난 기회로 여길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북한 수뇌부의 속내가 늘 전언에만 머물고 어디에도 문서화되지도, 공표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엊그제도 북한 매체는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불청객인 미제 침략군의 무조건적인 철수”를 주장했다. 그러니 달콤한 입발림 술책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이번 남북, 북-미 정상회담은 김정은의 본심을 확인할 기회다. 공동발표문 또는 김정은 입에서 언명(言明)으로 나와야 진짜 ‘주한미군 철수는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김정은#특사단#한미 연합 군사훈련#남북 정상회담#주한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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