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왜 매번 ‘평양 정상회담’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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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북한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분위기와 환경이 마련되는 데 따라 최고위급 회담도 못 할 이유가 없다”고 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초청은 예고된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김여정이 가져온 초청장을 받아들고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키자”고 정답을 내놓았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빠뜨린 게 있다. “이번엔 귀측에서 서울로 올 차례 아닌가”라고 반문했어야 한다.

늘 한 수 접어주는 對北 자세

2000년 제1차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인 6·15공동선언에는 ‘김대중(DJ)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 박혀 있다. “나이 많은 내가 먼저 평양에 왔는데 김 위원장이 서울에 안 오면 되겠느냐”는 DJ의 설득에 김정일이 마지못해 받아들인 문구라곤 하지만 엄연한 정상 간 합의였다.

하지만 2007년 노무현 대통령도 김정일의 서울 답방을 받아내지 못하고 평양을 방문함으로써 남북 정상회담은 으레 평양에서 하는 것으로 굳어져 버렸다. 10·4정상선언에는 ‘남과 북은 남북 관계 발전을 위해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 문제들을 협의하기로 하였다’고만 돼 있다. 앞서 1994년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불발된 정상회담도 김영삼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문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은 서울에서 열자고 해도 북측이 받아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 번쯤 짚고는 넘어갔어야 한다.

언제부턴가 남북 관계에선 우리가 북한에 한 수 접어주는 게 관성처럼 돼버렸다. 과거 북-미 대화에 참여했던 미국 전문가는 북한과의 협상을 ‘포크와 나이프 사용을 거부하는 어린애와 함께 식사하는 것’에 비유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엉망진창인 테이블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조금씩이라도 바꿔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북측의 김영철 파견 통보가 오자마자 우리 정부가 덥석 받아들인 것도 이런 ‘당연시’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정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잠시 망설인 기색도 없이 수용했다. 이러니 김영철을 둘러싸고 남남(南南) 갈등 사달이 날 수밖에 없다. 수용이 불가피했다면, 천안함 희생 장병 유족들에게 먼저 알리고 이해를 구하는 게 순서가 아니었을까. 유족들이 받아들이진 않았겠지만 그렇게까지 격한 반응은 안 나왔을 수도 있다.

정부의 김영철 파견 수용 이후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통일대교로 몰려갔다. ‘처죽일 작자’를 육탄으로 저지하겠다며 아스팔트에 드러누운 야당 의원들의 거친 언동과 이벤트성 시위는 볼썽사나웠지만, 응당 북측에 왜 하필 김영철이냐고 물었어야 하지 않은가.

이런 반발이 없었다면 김영철은 능수능란한 처신으로 다시 국민의 불편한 속을 뒤집어놨을지 모른다. 과거 남북회담에서 김영철과 대면했던 예비역 장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똘똘하고 약삭빠르기가 타고난 협상꾼이다.” “목청을 높이다가도 구걸하다시피 하는, 변화무쌍한 모사꾼이다.” 이런 인물을 호텔에 34시간이나 꼼짝없이 묶어뒀다.

野 ‘서울회담’ 제안한다면

보수세력 반발은 우리의 대북 협상력을 강화해주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한국당은 아예 청와대를 ‘주사파 소굴’로 몰아붙이며 ‘체제 전쟁’까지 선포했다. 역시나 대북 협상에 기댔던 보수 정부 시절 자신들의 과거는 돌아볼 생각도 없다. 일부 보수단체는 미국을 향해 “북한을 폭격하라. 우린 죽어도 상관없다”고 외친다. 이런 막무가내 주장으로는 답이 없다. “김정은을 환영하긴 어렵지만 정상회담은 서울에서 하라”는 얘기가 야당에선 나올 수 없을까.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김정은 신년사#6·15공동선언#남북 관계#남남 갈등#김영철 파견 수용#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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