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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정훈]한국과 미국, 서로 솔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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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정훈]한국과 미국, 서로 솔직한가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입력 2018-02-07 03:00수정 2018-02-0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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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깜짝이야.’ 지난달 3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 탈북자 지성호 씨가 목발을 들었을 때였다. 분명 백악관의 사전 초청자 명단에 지 씨는 없었다. 그는 트럼프의 깜짝 카드였다. 전 세계는 장애를 이겨낸 그의 이야기에 가슴 뭉클해했고, 김정은 정권의 만행에 분노했다.

주미 한국 대사관은 더 놀랐다. 지 씨가 생중계 화면에 등장할 때까지 초청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이벤트는 워싱턴의 탈북인권단체와 백악관이 두 달 가까이 기획한 일이다. 대외정보 담당인 주미 대사관 정무2과는 이 일로 본부의 질책을 받았다. 한 소식통은 “한미 외교 당국 간 수시로 소통이 이뤄지는데 왜 이런 정보가 공유되지 않았는지 황당하다”고 했다.

기자는 트럼프가 북한 인권에 별 관심이 없다고 본다. 미국 우선주의와 북한 인권은 말 자체도 어울리지 않는다. 대화를 통한 북핵 해결 시점은 지났다고 보고, 평창 겨울올림픽 이후 군사옵션 명분을 쌓겠다는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1998년 코소보, 2011년 리비아, 지난해 시리아 모두 인권을 명분으로 공습했다.


트럼프는 한국 정부 보란 듯이 탈북자 문제를 계속 공략하고 있다. 과거 유엔의 대북인권결의안에 기권했던 세력이 대북 인도적 지원에 동참해 달라고 요청하는 건 난센스라는 시각도 갖고 있다. 인도적 지원이 결과적으로 북한체제 동요를 막는 데 힘이 된다는 걸 미국은 잘 안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 인권은 물론, 탈북자 문제 자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김정은을 대화 파트너로 봐야 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딜레마다. 트럼프는 이 딜레마까지 거칠게 파고들었다. 탈북자를 앞세워 그 김정은을 ‘최악의 인권 유린 독재자’로 세계에 각인시켰다.

빅터 차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의 주한 미국대사 낙마 건도 한미동맹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미국은 한국 정부 아그레망(임명동의)까지 받아놓고 사전 협의나 통보도 없이 내정을 철회했다. 한국계인 차 석좌는 미 여권에서 영향력이 크지 않고, 트럼프와 친분도 없다. 정권 인수위 출신으로 트럼프와 수시로 통화한다는 금융사업가 윌리엄 해거티가 지난해 8월 주일 미대사로 부임한 것과 비교된다. 한국은 1년 넘게 대사직이 공석이어도 괜찮다는 식이다. 결국 이 일은 트럼프-문재인 시대의 한미동맹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 공인한 사건이 됐다.

트럼프는 이제 한국과 일본을 대놓고 차별한다. 지난해 179억 달러의 대미 무역 흑자를 낸 한국이 세탁기와 태양광부품에 대한 세이프가드 조치를 당하는 사이, 그 3배의 대미 흑자(644억 달러)를 낸 일본은 ‘미국 우선주의 무풍지대’에서 호황을 즐기고 있다. 일본 기업에 날개를 달아준 엔저(円低) 정책까지 눈감아 준다. 우리가 비굴하다고 흉보는 아베의 ‘트럼프 스토킹’이 낸 성과다.

가장(家長)의 비굴함은 때론 무죄다. 아베가 고개를 조아린 대상은 트럼프가 아니라 그 너머의 국익일 것이다. 힘센 미국에 무조건 굽실거리자는 게 아니다. 자존심은 제때 써야 빛이 난다. 중국과 북한의 삐뚤어진 요구는 수용하고, 미국에만 자존심을 세우려 한다면 그걸 균형외교로 포장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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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지금 상대국에 어떤 존재인가. 미국은 소외시키고, 중국은 무시하고, 일본은 적대시하고, 북한은 등칠 궁리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보수 정권을 향한 ‘등신 외교’ 비판은 언제든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다.

한미 양국은 늘 “한미동맹이 어느 때보다 굳건하다”고 한다. 요즘 이 말이 어느 때보다 공허하게 들린다. 진심 없는 수사(修辭)만으론 동맹을 지킬 수 없다. 평창에서 가장 시급한 건 남북대화도, 북-미대화도 아닌, 솔직한 한미 대화다.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sunshade@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탈북자 지성호 씨#탈북인권단체#북한 인권#빅터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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