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정훈]평창 이후가 더 걱정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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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핏줄은 특별한 존재다. 냉정하게 대하고 나면 가슴 한쪽이 아리다.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 폐막식에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 등 북한 실세 3인방이 깜짝 등장했을 때 많은 국민이 환호한 것도 그런 이유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우리 장병 46명을 희생시킨 장본인들은 그렇게 박수를 받고 돌아갔다. 핏줄에 대한 끌림. 김정은은 자신을 선의로 보게 하는 마법의 열쇠로 쓰고 있다.

핏줄이 아닌 미국은 다르다. 그들은 팃포탯(Tit-for-Tat) 전략으로 평창 올림픽에 접근한다. 팃포탯은 ‘협력자에게는 협력하고, 배신자는 응징해 협력자를 최대한 늘리면서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게임이론이다. 한국이 정권교체 이후 달라졌지만 계속 협력자로 두고, 배신자였던 북한에는 협력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통화를 요청해 “대북제재를 이어 가겠다”는 다짐을 받은 것도 배신의 길을 막겠다는 팃포탯 전략의 일환이다.


“샴페인을 너무 마셨다”며 아니꼽게 바라보던 백악관이 남북 대화를 “100% 지지한다”며 태도를 바꾼 배경은 뭘까. 워싱턴의 한 외교소식통은 “백악관과 국무부가 김정은 신년사 전문을 과거의 것과 정밀 비교해본 결과 ‘자력자강’을 강조하는 부분 등을 통해 경제 상황이 심각하다고 결론짓게 됐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 덕에 남북 대화가 시작됐다’고 평가한 것도 이런 분석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김정은이 백기를 든 것으로 볼 수 있느냐다. 대북제재는 중국과 러시아에 여전히 구멍이 나있다. 유류 공급을 줄여도 잘 버티고 있다. 수십 년 제재를 견디며 6개국만 가졌다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래서 평화 공세로 미국을 묶어두고 올림픽 이후 도발을 재개할 가능성도 있다. 도발을 뜻하는 청기를 들려다 백기를 든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핵은 김정은의 유일한 슈퍼파워다. 주한미군을 몰아내고, 남한을 적화하는 용도를 달성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백악관이 남북 대화가 북-미 대화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해 “지켜보자”고 한 건 비핵화 논의로 이어질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평창 이후까지 대화 국면을 이어갈 생각이다. 문정인 대통령외교안보특보는 4일 인터뷰에서 “10·4남북정상회담 후속 조치로 경제 문화 분야에서 45개 협력사업을 합의했는데, 이 중 20개 정도는 유엔과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협력이 가능하다”며 “북한의 기대에는 못 미치겠지만 경색된 국면을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한 정부에 정치적 득점이 되는 일을 북한이 공짜로 해준 적은 없다. 대화 국면이 이어져도 뒤로 엄청난 요구를 쏟아낼 것이다. 미국과 국제사회를 배신하라는 핏줄의 요구를 문재인 정부는 과연 뿌리칠 수 있을까.

평창 올림픽은 이미 스포츠 축제라기보다 외교의 장이 돼 버렸다. 대다수 국민은 누가 금메달 후보인지조차 잘 모른다. 대신 북한에서 누가 대표단을 이끌고 내려올지, 뭘 타고 올지,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관심이다. 평창이 북한의, 북한에 의한, 북한을 위한 외교무대가 된 것이다.

김정은이 평창을 이용해 시간만 벌고 떠나 버린다면 후유증은 크고 오래 갈 것이다. 세금만 축내고 김정은에게 이용당했다는 여론도 들끓을 것이다. 트럼프는 “거 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고 할 사람이다. ‘핏줄끼리 잘해 보라’며 우리를 배신자로 몰아 응징할 수도 있다.

핵을 포기할 수 없는 김정은, 포기하지 않으면 대화하지 않겠다는 트럼프. 그 둘 사이에서 문 대통령이 비핵화라는 핵심을 파고들지 못하면 달라지는 건 없다. 평창 이후가 걱정이다.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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