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부형권]병원이 음대생을 채용하는 그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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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경제부 차장
부형권 경제부 차장
혁신적 다리(Innovative Bridge). 2006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설립된 예술·교육 전문 비영리단체 이름이다. 줄여서 이노비(EnoB)라고 부른다. 장애인, 입원 환자, 노인, 다문화 가정 등을 찾아가 무료 공연을 한다. 너무 비싸서, 또는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접할 수 없던 고급 음악을 들으며 그들은 행복하다. 재능기부에 참여한 예술가들도 그 행복을 보며 같이 행복하다. 한국과 중국에도 지부가 있는 글로벌 조직이다.

“공연 시작 전 환자들 표정은 무뚝뚝하기만 하다. 그러나 음악이 울려 퍼지면 행복한 얼굴로 바뀌고, 끝날 땐 함박웃음을 짓는다. 환자도, 보호자도 음악으로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 ‘병원에 상주하는 연주가가 있다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지난달 서울에서 만난 이노비 강태욱 대표(46)의 말이다. 이 문제의식은 문화복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새 ‘혁신 다리’ 만들기로 이어졌다. 국민대 예술대학과 양해각서(MOU)를 맺고 ‘국민대-이노비 나눔 콘서트’ 형식으로, 음대생들의 병원 공연을 정규 수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새로운 실험을 하는 49명의 학생 중에서 병원 취업자가 나오면 좋겠다”고 강 대표는 기대했다.

흔히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고 한다. 현 정부에서도 대통령이 일자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일자리가 성장이고, 국민의 권리”라고 강조한다. 이달 18일 발표된 ‘일자리 정책 5년 로드맵’과 ‘사회적 경제 활성화 방안’도 일자리에 대한 절박함과 간절함을 담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일자리 허기(虛飢)가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좋은 일자리 창출 전쟁’이 (다른 모든 전쟁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모든 나라에 일자리 부족은 만병의 근원이다. 정치적 불안정이 오고, 고급 두뇌가 해외로 유출되고, 정권을 뒤엎는 혁명적 상황을 맞게 된다. 군사력이나 미 달러가 아니라, 좋은 일자리가 세상을 이끌어가는 시대다. 개인에게도 좋은 일자리는 결혼보다 중요하고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와 종교보다 더 강력하다. 전 세계인의 가장 간절한 소망이 좋은 일자리다.” 글로벌 여론조사기관 갤럽의 짐 클리프턴 회장(66)이 주장해온 ‘일자리 세계대전’론이다.

개인적 직관이 아니라, 세계 인구의 99%가 사는 160개국에서 10년간 여론조사를 한 결과다. “만약 미 연방정부에 일 잘하는 ‘일자리창출부(Department of Job Creation)’가 있다면 국무부나 국방부마저도 압도하는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일자리 세계대전 기운은 곳곳에서 감지돼 왔다. 아무리 봐도 ‘희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예상 밖 당선 수수께끼도 일자리 코드로만 풀 수 있다. 그는 “중국 멕시코 등이 미국 일자리를 다 도둑질해갔다”며 진보 성향의 러스트 벨트(쇠잔한 공업지대) 블루칼라 마음을 사로잡았다. 난민 유입에 반대하는 극우 성향 30, 40대 젊은 지도자들의 약진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에서 ‘공사 재개’ 결정으로 중심추를 기울게 만든 20대의 힘도 ‘줄어들 일자리’에 대한 우려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는가.

한국의 일자리 정책은 치열하고 살벌한 일자리 세계대전에 대비한 전시(戰時)대책일까. 미국 독일 일본 같은 선진국에 비해 나라도 작고, 인구도 적은 우리의 무기는 무엇인가. ‘병원의 상주 음악가’ 같은 혁신적 발상, 새로운 일자리를 발견하고 발명해내는 창의성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런 날이 와야 한번 세게 맞붙어볼 수라도 있지 않겠나.
 
부형권 경제부 차장 bookum90@donga.com
#혁신적 다리#enob#병원의 상주 음악가#일자리 허기#국민대-이노비 나눔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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