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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승헌]적폐청산에도 ‘레드라인’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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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승헌]적폐청산에도 ‘레드라인’은 있다

이승헌 정치부 차장 입력 2017-10-09 03:00수정 2017-10-0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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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정치부 차장
e메일을 받고 이렇게 한참을 들여다본 것도 처음이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사무실에서 보낸 것이었다. 추석 다음 날이었다. 오바마의 퇴임 후 행적이 궁금해 올해 초 e메일 리스트업 신청을 했었다.

그런데 거기엔 오바마의 말은 없었다. 그 대신 “조지 H 부시(아버지 부시) 사무실에서 방금 이런 보도자료를 냈다”는 안내와 함께 그 자료가 첨부되어 있었다. 아버지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오바마, 그리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21일 콘서트를 개최한다는 내용이었다. 생존해 있는 전직 미 대통령 5명이 지난달 미국 텍사스, 플로리다를 강타한 허리케인 피해 주민들을 돕기 위해 주최하는 자선 모금 행사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 된 미국의 호소(Deep from the Heart: The One America Appeal)’라고 지었다. 며칠 뒤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콘서트 표는 이미 다 팔린 상태였다. 아버지 부시는 자료에서 “피해자들은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데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명심해라. 항상 우리 전직 대통령들이 곁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올해 초 급성 폐렴으로 입원까지 했던 고령(93)의 전직 대통령이 내미는 손길이 느껴졌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클린턴, 부시, 오바마가 미 프레지던츠컵 골프대회 개막식에서 어깨동무를 한 사진이 국내 언론에 ‘부럽다’는 제목과 함께 대서특필된 게 불과 지난달 말이었다. 우리는 같은 기간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 드라이브로 전전(前前) 대통령과 거친 입씨름을 벌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 기간이 연장될지도 이슈로 떠올랐다.

이런 차이는 미국에 적폐청산이 없어서일까. 천만에. 어디 가나 정치는 사람이 하는 일. 역대 많은 미 대통령들이 이전 정권을 부정하고 뒤집었다. 오바마는 부시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비판하며 중동 철군을 내세웠다. 트럼프는 자신만의 적폐청산 브랜드까지 만들었다. ‘Drain the Swamp.’ (워싱턴에서) 오물을 빼내겠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오바마의 시그너처 공약인 오바마케어 폐지를 시도 중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대해선 “클린턴 부부가 사상 최악의 협정을 맺었다”며 폐기나 대폭 개정을 공언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트럼프 시대에도 전직 대통령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활동하고 허리케인 피해 주민 돕기 행사까지 할 수 있는 걸까. 기자는 같은 적폐청산이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전 정권의 철학과 정책은 비판하고 청산하더라도, 사람과 그 역사에 대해선 신중하다는 것이다.

‘Lock her up.’ 지난해 트럼프 대선 유세장에서 가장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다. e메일 스캔들을 둘러싸고 거짓말을 일삼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구속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도 이 구호를 들으면 웃거나 따라했다. TV 토론에선 클린턴에게 “(내가 당선되면) 당신은 감옥에 갈 것”이라고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대선 승리 후엔 선을 그었다. 트럼프는 지난해 12월 9일 미시간주 행사에서 ‘Lock her up’ 구호가 나오자 “이 말이 대선 전에는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젠 잊어버리자”고 말했다.


혹자는 어떻게 클린턴, 부시, 오바마가 이명박, 박근혜와 같냐고 할지 모르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한 만큼 ‘비극의 균형’이 이뤄져야 적폐청산이 비로소 끝날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동시에 이 ‘저주의 사슬’을 이어가는 게, 다음 정권에서도 계속되는 게 정상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 역시 많을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 차장 ddr@donga.com


#적폐청산#트럼프 오바마케어 폐지 시도#북미자유무역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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