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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승헌]우리가 트럼프 ‘디스’할 처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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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승헌]우리가 트럼프 ‘디스’할 처지인가

이승헌 정치부 차장 입력 2017-09-27 03:00수정 2017-09-2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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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정치부 차장
그 도도하던 힐러리 클린턴 맞나 싶었다.

얼마 전 CNN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를 듣고서다.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에게 당한 충격적 대선 패배 과정을 짚은 ‘무슨 일이 벌어졌나(What Happened)’라는 회고록을 낸 뒤 가진 인터뷰였다.

“트럼프에 여전히 반대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사람들의 분노에 어떻게 감성적으로 대처할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분노를 해결할 정책이 있었는데 정작 사람들은 해결책보다는 함께 분노해줄 사람과 그 말을 원했다. 내가 부족했던 대목이다. 그래서 졌다.”

기자는 트럼프 등장 이후 이처럼 트럼프의 본질을 제대로 끄집어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대선을 치른 적장(敵將)의 평가여서 더 그랬던 것 같다.


클린턴의 트럼프 평가가 떠오른 것은 요즘 트럼프 말에 대한 문재인 정부 안팎의 평가가 오버랩되면서다. 김정은과 벌이는 핵폭탄급 말 전쟁의 수위가 올라갈수록 트럼프에 대한 평가가 곱지 않다. 김정은 성명처럼 ‘늙다리 미치광이’까지는 아니지만 “왜 김정은을 자극해서 한반도를 불안하게 하느냐”는 불만이다. 얼마 전 정부 핵심 관계자는 기자에게 “미국 언론은 트럼프를 비판하는데 우리 언론은 트럼프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긴다”고 따지기도 했다. 문 대통령이 지난주 유엔 총회 기간에 트럼프를 만나 ‘북한을 멸망시키겠다’는 그의 발언에 대해 “그런 강력함이 북한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했지만, 본심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다.

분명 트럼프의 말은 거칠고 위험하다.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했던 전임 버락 오바마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말이다. 하지만 클린턴의 평가처럼 트럼프의 언어는 땅을 딛고 있다. ‘아시아 회귀 정책’ 등 설명 없으면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려운 오바마와는 달리 곧장 핵심을 찌른다. 그래서 파장은 더 크다. 북핵 위기에선 ‘미 본토가 공격당할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걱정에 불을 질렀다. 물론 김정은의 핵 폭주를 자극한 측면도 있다. 동시에 국제사회에 북핵 경각심을 이만큼 일깨운 것도 트럼프의 혀다. ‘로켓맨’처럼 김정은의 핵 장난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국제적으로 이슈화하는 건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23일 뉴욕에서 열린 수전 손턴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대행의 기자회견 질문은 100% 북핵으로 채워졌다. 클린턴이 집권했더라면 김정은이 핵 도발을 이어가도 비핵화 운운하며 북핵 정책이 흐지부지됐을 것이라는 관측은 그래서 나온다.

이렇게 무식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다양한 함의와 파장을 갖고 있는 트럼프 말에 대한 우리 정부 안팎의 평가는 겉핥기 수준이다. 왜? 트럼프와 백악관 핵심의 생각을 잘 모르니까 주로 외곽 인사를 만나거나 미 언론 정도를 보기 때문이다. 그나마 보는 것도 트럼프 관련 핵심 정보는 별로 없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반(反)트럼프 성향의 진보 매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트럼프가 엄연한 정치적 현실이라는 점을 종종 잊고 있는 듯해서다. 우리가 북핵 제1 상수(常數)인 그의 상스러운 말에 질겁하고 김정은과 비슷한 미치광이로 ‘디스(disrespect·비난)’해봤자 우리에게 득 될 것은 없다. 오히려 트럼프의 말폭탄에 한숨쉬기보다 그 진의와 배경을 파악해야 한다. 추석 앞두고 백악관에 송편이라도 돌리며 트럼프의 호흡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식의 각성과 결기가 있어야 미증유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트럼프와 으르렁거리는 중국이 왜 트럼프 큰딸 이방카와 손녀 아라벨라를 올 2월 워싱턴 중국대사관 춘제(설날) 행사에 초청하려고 혈안이 되었겠는가. 6·25전쟁 이후 최대 위기라는 요즘은 정부가 나이브한 것도 죄다.
 
이승헌 정치부 차장 ddr@donga.com


#what happened#힐러리 클린턴#함께 분노해줄 사람과 그 말을 원했다#로켓맨#트럼프의 말은 거칠고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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