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건의 오늘과 내일]정치권에 무릎 꿇는 검사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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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건 사회부장
이명건 사회부장
2005년 초 노무현 정부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과 만났다. 여당 취재를 전담하던 나는 본보 선배 기자와 함께 셋이 서울 인사동의 한정식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최측근 참모로 활동했던 그는 노무현 정부 초반 실세로 군림했다. 2005년 당시엔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식사 도중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어이 동생∼ 괜찮으니까 이리 오게.” 30분쯤 뒤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법조담당 기자를 할 때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에서 본 간부 검사였다. 2005년엔 지방 고검에 있었다. 다른 검사 1명과 같이 방에 들어서더니 곧바로 의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으로 술을 따랐다. “형님∼ 안녕하셨습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 의원은 호기롭게 술잔을 받아 마셨다. 검찰 정기인사가 임박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 검사는 인사에서 주요 보직을 맡지 못했다. 얼마 뒤 대법원에서 당선 무효 판결을 받은 의원이 힘을 제대로 못 썼기 때문이 아닐까.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비슷한 일이 이어졌다. 일부 검사가 박 전 대통령의 측근 실세뿐 아니라 박 전 대통령이 거리를 둔 동생 박지만 EG 회장에게 줄을 댔다. “누나에게 잘 좀 말씀해주세요.” 박 회장은 박 전 대통령 구속 직후 “검찰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주변에 털어놨다.

그리고 2017년. 요즘 같은 대선 시기엔 정치권을 향한 물밑 작업이 더 치열하다. 새 정부에서 튼튼한 동아줄이 될 정치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박 전 대통령 구속영장 청구 여부 결정을 앞두고 검찰 안팎에서 이런 얘기가 많이 돌았다. “유력 대선 주자가 영장 청구에 찬성할까, 반대할까. 그게 기준이다.”

물론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오로지 수사 성과로 실력을 입증하고 보직 경쟁을 하는 검사가 많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인사가 날 때마다 좌절하고 갈등에 빠진다. ‘나도 뒷배를 찾아야 하나.’

검찰 내부에서 “검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검사 자신”이라는 자조 섞인 얘기까지 나온다. 정치권에 진 인사 빚을 갚기 위해 ‘맞춤형 수사’를 하고 그 대가로 다음 인사에서 또 덕을 보는 경우를 목도한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검찰로부터의 수사권 독립을 원하는 경찰은 바로 이 약점을 파고들었다. 7일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검찰은 국정 농단의 최소한의 공범”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검찰은 “심각한 명예훼손”이라고 반박했다. 정말 그럴까. 그보다 검찰은 어쩌다 이렇게 경찰이 검찰을 노골적으로 정면 공격할 수 있게 됐는지 곱씹어 봐야 한다. 한 40대 검사는 “지휘 대상인 경찰마저 우리를 우습게 보니 동네북이 다 됐다”고 한탄했다.

검찰의 존재 의의는 ‘거악 척결’에 있다. 아직도 많은 검사가 이 사명감으로 격무를 헤쳐 나가고 있다. 거악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 정치권의 도움을 받았다는 검사가 있다. “검찰을 권력 도구로 이용하는 정치권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검사도 있다. 일면 수긍이 간다.

하지만 검사가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규정하고 선언했는지 돌이켜봐야 한다. 모든 검사는 임관할 때 ‘검사선서’를 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중략)…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검찰청법 4조에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 규정돼 있다. 정치권에 무릎 꿇고, 충성 맹세하고 수사와 인사를 맞바꾸는 건 명분이 뭐든 ‘공선사후(公先私後)’가 아니다. ‘사선공후(私先公後)’다. 정치권이 유혹하든 압박하든 거부하고 견뎌내야 검사다.

이명건 사회부장 gun43@donga.com
#검사#노무현#박근혜#정치권#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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