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용관]바보들의 섬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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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정치부장
정용관 정치부장
“사방에 적뿐인 광야에서 죽을 수도 있지만…”이라며 독자 노선의 결기를 보인 그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제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 자리에서 만난 안철수는 짐짓 여유를 보였지만 속은 타들어가는 듯했다.

대뜸 “반전카드가 뭐냐”고 묻자 그는 “김종인 위원장께서 기회를 주셔서…”라고 했다. 야권 통합 제안 공세에 비교적 잘 버티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고 하자 또 “그 노회한 분이 이렇게 기회도 주시네요”라고 했다. 머릿속이 온통 ‘노회한 김종인’에 대한 불편함으로 가득 차 보였다.

그가 ‘김종인 착시현상’을 언급하며 임시사장이라는 표현을 다시 꺼낸 건 그때였다. 더불어민주당의 주주는 따로 있는데, 임시사장이 들어와서 통상적인 대표 권한 이상의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고 있고, 정작 주주들은 침묵하는 현상은 굉장히 기형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살짝 책상을 치기도 했다. 더민주당의 진짜 주인은 문재인이냐고 묻자 그는 “세력이죠”라고 짧게 답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에게서 ‘문재인 콤플렉스’를 느꼈다. 열등감이 아니다. 사전적 용어 그대로 현실적인 행동이나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의 감정적 관념이다. 2012년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단둘이 최종 담판을 벌였을 때 문재인에게 느꼈던, 하지만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얘기하지 않았던 바로 그 농축된 불신의 덩어리 같은 게 여전히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안철수가 더민주당의 진짜 주인이라고 내심 여기는 문재인은 같은 날 경남 양산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나고 있었다. 대표직 사퇴 후 공식 인터뷰였다. 내용을 보면 그는 더 이상 짐 보따리 싸들고 양산으로 낙향할 때의 ‘문재인 일병’이 아니었다. 김종인 카드는 신의 한 수라고 판단한 듯 “안철수는 실패했다”고 일갈했을 뿐 아니라 이번 주부터 강원 경북 등 이른바 험지 쪽으로 직접 지원을 나가겠다고 했다. “김종인 지도부가 (문재인 체제 시절 만든) 시스템 공천을 허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답변에선 더민주당을 장악한 김종인 체제를 존중하면서도 공천 과정에서 역린을 건드리는 것까지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느껴졌다.

그러나 비례대표 4선의 김종인은 역시 고수다. 같은 날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한 그는 특유의 시니컬한 어투로 “대통령 꿈꾸는 사람들과 얘기해 보면 대번에 아는데 지금 (야권에선) 전혀 안 보인다”고 염장을 질렀다. 자신을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한 문재인도 대통령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상 ‘데드라인’이 지난 야권 통합을 전격 제안해 안철수를 뒤흔든 데 이은 2탄 격이다.

‘착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김종인 현상은 좀 특이해 보이긴 한다. 더불어 야권 지형, 정치 지형 전반을 휘젓고 있는 김종인 파워는 영속할 것인지, 본질은 과연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100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경제민주화가 실체가 있는 건지, 옳은 해법인지를 떠나 적어도 그가 이번 총선의 핵심 이슈가 경제라는 걸 정확히 꿰뚫고 있고 집요하게 그 이슈를 물고 들어가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사석에서 총선과 대선 전망을 묻는 이들이 많지만 이번만큼 대답하기 어렵고 머리가 뿌연 적도 드물다. 오랜 정치부 기자의 습성대로 선거구도가 어쩌고 공천전쟁이 어쩌고 하는 정치공학만 생각하니 답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1992년 미국 대선 때 빌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고 했던 바로 그 ‘바보’였다. 나는 적어도 바보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바보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이 여의도 정치권이다. ‘바보들의 섬’에서 김종인이 활개를 치고 있다. 여권에는 착시라도 일으킬 책사나 대통령감이 있던가?

정용관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김종인#안철수#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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