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연욱]상도동과 동교동의 연정(聯政)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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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욱 정치부장
정연욱 정치부장
김영삼(YS)과 김대중(DJ)은 옛 민주당 구파와 신파를 대변하는 기대주였다. 그 뿌리는 깊었고 그림자도 길었다. YS 정부 마지막 국무총리에 호남 출신인 고건이 중용될 때도 YS와 고건의 아버지 고형곤 전 전북대 총장의 인연이 한몫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YS와 고 전 총장은 옛 민주당 구파로 함께 활동했었다.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은 “보통 민주당 신파가 경상도, 구파가 전라도 사람인데 YS와 DJ 두 사람만 바뀌었다”고 말했다. 양김(兩金) 시대의 뿌리를 따져보면 무조건 영·호남 지역주의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YS, DJ는 민주화라는 대의명분 앞에서 손을 잡았지만 대통령선거를 앞에 두고는 쉽게 양보하지 않았다. 1987년 대선이 그 본보기였다. 양김의 선거유세 곳곳에는 안기부 공작의 흔적이 짙게 배어났다. 양김 캠프가 서로 동원 청중 수를 놓고 신경전을 벌일 때면 인원수를 적절하게 안배하며 균형을 맞췄다는 당시 여권 인사들의 증언도 있다. 양김 모두 “내가 이긴다”는 착각에 빠지도록 만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양김 세력을 중심으로 지역주의 골은 깊어졌다.

YS 집권 후에도 상도동과 동교동의 전쟁은 이어졌다. DJ가 1995년 지방선거 승리를 디딤돌 삼아 정계 복귀에 나서자 이듬해 YS는 여당의 총선 승리로 반격했다. 상도동과 동교동의 반목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변곡점을 맞는다. 당시 여당의 대선후보 이회창이 YS와 충돌하면서다.

상도동은 반발했다. 좌장격인 최형우는 쓰러지기 전에 사석에서 “이회창이 민주화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이럴 바에야 김대중이 대통령 되는 것이 낫다”고 호언했다. 여야의 틀을 뛰어넘는 상도동계 일각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다. 이회창 캠프는 DJ 비자금 문제를 터뜨리며 YS를 압박했으나 YS는 수사 중단으로 받아쳤다. 이 수사의 향배가 1997년 대선 판도를 갈랐다는 점은 동교동도 인정한다. YS와 이회창의 갈등이 증폭될수록 상도동과 동교동의 연정(聯政)은 무르익어 갔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인사의 증언.

“당시 대선이 임박하면서 청와대 인근 한 음식점에 동교동 인사들의 캠프가 은밀히 설치됐다. 이들은 매일같이 YS 청와대 인사들을 전방위로 만나며 집요하게 ‘DJ 대통령’의 명분을 설득했다. 이 자리에선 ‘민주화 운동을 같이한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도 종종 등장했다. 이 같은 분위기가 YS에게도 전달됐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의 승리는 친노무현 세력과 호남 그룹이 손을 잡고 거둔 쾌거다. 하지만 주류가 된 친노 세력은 집권 기간 내내 호남 그룹과 낯을 붉혔다. 특히 주류 친노와 호남을 기반으로 한 동교동은 원만하지 못했다. 당시 여권 일각에선 “노무현이 좋아서 찍은 게 아니라 이회창이 더 싫어서 찍은 것 아니냐”는 흉흉한 입소문까지 나돌았다. 감정의 골은 깊이 패었다. 지금의 문재인과 호남 주류 간 갈등의 깊은 뿌리도 이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YS 서거 이후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진 듯한 상도동과 동교동의 미래가 다시 관심을 모은다. 두 정파는 낙엽까지 다 떨어진 고목이라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상도동과 동교동의 연정이 맺은 뿌리는 남아 있을 것이다. 2017년 대선은 명분 있는 연정의 무대가 될 것이다. 여야의 기존 틀은 낡은 패러다임이다. 호남권과 갈등을 빚는 문재인이 “당권을 쥐고 있으면 호남은 결국 나를 밀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여당이 호남권과 손을 잡는 시대도 올 수 있다. 2년 뒤 대선코드를 읽으려면 상도동과 동교동의 연정이 갖는 정치적 함의에 주목해야 한다.

정연욱 정치부장 jyw11@donga.com
#김영삼#김대중#민주화#상도동#동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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