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최영훈]박 대통령의 메르켈 벤치마킹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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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논설위원
최영훈 논설위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은 친분이 두텁다. 박 대통령은 15년째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메르켈 총리와 6번 만났고 여러 차례 축하서신도 교환했다. 박 대통령의 심중에 깊이 새겨진 만남은 2006년 9월 독일에서의 두 번째 만남이다. 방독 전 박 대통령은 김종인 당시 민주당 의원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김 의원은 “당신은 큰 꿈을 꾸고 있으니 동독 출신으로 16년 만에 집권에 성공한 메르켈을 벤치마킹하라”고 조언했다.

그때 메르켈 총리는 독일 국민의 노동시장 개혁 거부감으로 지지율이 추락하며 힘든 시기를 맞고 있었다. 총리 집무실에서 40분쯤 단독 면담한 뒤 박 대통령은 “서로 생각하는 데 공통점이 많았다”고 했다. 메르켈 총리의 경제·사회 개혁 방향에 대해서도 공감을 표시했다. 박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를 벤치마킹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바로 다음 날 당내 경선 참여의 뜻을 최초로 밝혔다.

메르켈 총리가 최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전후해 과거사를 직시하라는 발언에 이어 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라는 쓴소리까지 했다. 독일의 과거사 반성 경험을 전하는 방식의 노련함과 일관된 메시지 전달의 단호함이 돋보였다. 극우 성향의 산케이신문은 외무성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한국의 로비’ 운운하는 억지 주장을 했지만 국제사회는 호평을 보냈다.

단호할 때와 유연할 때를 아는 것은 정치지도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어지간한 자신감과 내공이 없으면 거꾸로 하기 십상이다. 단호해야 할 때 유연하게 하는 바람에 일을 그르치면 정작 유연해야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한다. 결국 실패의 쓴맛을 두 번 보게 된다. 메르켈 총리는 단호함과 유연함을 적절히 구사하는 드문 정치인이다.

박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는 닮은 점이 많다. 보수 야당의 대표로 당을 위기에서 구한 뒤 집권에 성공한 점이 그렇고 이공계 출신으로 말수가 적고 고독을 즐기는 것까지 닮았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태생적으로 박 대통령이 18년간 집권한 대통령의 딸이라는 후광을 입은 반면 메르켈 총리는 청빈한 목사의 딸로 정치인으로 자수성가했다.

기민당의 메르켈 총리는 2005년 집권 후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출범시켜 전임 슈뢰더 사민당 정부의 정책을 계승했다. ‘정권’은 교체됐지만 ‘정책’을 교체하진 않았다. 2013년 3기 집권 때도 메르켈 총리가 주도해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성사시켰다. 경제부총리와 외교장관은 사민당에 통 크게 양보했다. 성장과 개혁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독일은 유럽 최강국의 반석에 올랐다. 메르켈의 유연한 리더십 덕분이었다.

박 대통령은 원칙을 중시하는 단호함에선 메르켈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안 된다’고 단칼로 자르는 것보다 유연하게 타협해 일을 성사시키는 것이 더 힘들다. 박 대통령은 17일 여야 대표와 회동해 현안을 논의하게 된다. 메르켈처럼 유연한 정치를 실천에 옮길 좋은 기회다. 박 대통령이 5월 9일 러시아의 전승기념일 70주년 행사에 참석하는 것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순 없을까. 올해가 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인 만큼 대북관계의 돌파구를 누군가는 열어야 한다. 내치(內治)뿐만 아니라 외치(外治)에서도 유연함을 실천할 여지는 있다.

박 대통령을 권좌에 오르게 한 공신 중 한 명인 김종인 전 의원은 “(박 대통령과는) 끝났다. 더 할 말이 없다”면서도 “내가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이 성공해야 한다”고 최근 심경을 토로했다. 그가 조언한 ‘메르켈 벤치마킹’은 지금 박 대통령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메르켈은 늘 국익과 국민을 앞세워 깊이 생각한 뒤 결단했다.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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