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철희]증오범죄와 트럼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29일 03시 00분


코멘트
반(反)유대주의의 뿌리는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신교 문명권에서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에 대한 주변 민족의 오랜 혐오는 기독교 문명의 확산 속에서 ‘예수를 죽인 민족’에 대한 격리와 차별로 이어졌다. 유대인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집단학살한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반유대주의 악행의 정점이었다. 그런 고난의 역사를 지닌 유대인들에게 미국은 새로운 피난처였고, 그들은 미국에 안착해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 미국 땅에서 유대인들을 향한 총기난사 사건이 27일 일어났다. 극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을 자주 표출해온 40대 범인은 피츠버그의 한 유대교 회당에 자동소총 1정과 권총 3정을 들고 난입해 “모든 유대인은 죽어야 한다”고 외치며 무차별 난사했다. 이로 인해 11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경찰을 포함해 6명이 다쳤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로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사건은 반트럼프 진영 인사들을 겨냥해 ‘폭발물 소포 테러’를 기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가 체포된 지 하루 만에 벌어졌다. 범인은 SNS 자기소개란에 “유대인은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썼고, 미국 국경으로 향하는 수천 명의 중남미 이민자 행렬인 ‘캐러밴’에 극도의 반감을 드러냈다. 그는 “트럼프가 유대인에게 둘러싸여 있다”며 친(親)유대 정책을 비판하긴 했지만, 국경 장벽 건설 등 트럼프의 강경한 반이민 정책 지지자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사건을 ‘인류에 대한 공격’이라고 규정하며 “증오를 극복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통합 메시지는 당장 반트럼프 진영의 코웃음을 사고 있다. 지난 대선 때부터 외국인 혐오와 인종차별적 언사를 남발했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등장 이후 정신적 트라우마에 빠져 불안·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이 늘면서 ‘선거 후 스트레스 장애’ ‘트럼프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용어까지 생겼다. 열흘도 남지 않은 투표일까지 또 어떤 증오범죄가 일어날지 미국인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반유대주의#트럼프#유대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