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평인]두 장벽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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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돈 윈즐로의 ‘개의 힘’은 멕시코를 중심으로 미국 남부와 콜롬비아에 이르기까지 마약조직의 검은 거래를 파헤친 흥미로운 책이다. 제목은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힘에서 구하소서’라는 성경 시편 구절에서 따왔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감독 드니 빌뇌브의 전작 ‘시카리오’(살인청부업자)도 모티브는 ‘개의 힘’과 비슷하다. 마약 밀반입과 그를 둘러싼 청부살인을 소재로 미국과 멕시코 국경의 황량하고 살벌한 이미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바로 그 국경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약으로 설치를 약속한 장벽의 시제품이 18일 선보였다.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남쪽 국경에 콘크리트와 철근 재질로 세워진 시제품 8개의 높이는 5.5∼9.1m에 이른다. 이만한 크기의 시제품이 장장 3000km에 이르는 국경지대에 세워진다면 그야말로 현대판 ‘만리장성’이 될 것이다.

▷장벽은 본래 외침을 막으려고 만들었다. 고대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야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고, 고대 중국의 만리장성은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 야만족이냐 아니냐, 오랑캐냐 아니냐의 기준이 그 장벽의 어느 쪽에 사느냐에 따라 결정됐다. 트럼프는 멕시코를 통한 미국으로의 밀입국이 경제적으로는 가히 외침이라고 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본 것 같다. 실은 게르만족의 이동이나 흉노족의 남하도 군사적인 외침이면서 동시에 경제적인 이주였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채택했던 미국과 멕시코 두 나라가 NAFTA를 폐기하고 장벽을 세우겠다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그러나 눈을 돌려 보면 세계에서 가장 강고한 장벽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철책과 지뢰 지대다. 이곳은 독일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이후 남아 있는 유일한 철의 장막이다. 11월 트럼프 방한 시 휴전선을 방문한다느니 마느니 말이 많다. 있는 장벽도 허물지 못하면서 마음의 장벽을 더 높이 쌓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얼마나 먼 길을 더 헤매야 사람들은 장벽을 허물 수 있을까.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돈 윈즐로#개의 힘#도널드 트럼프#멕시코#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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