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디지털 장의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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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지하의 회고록을 보면 서울대 재학 시절 사군자(四君子)를 그리는 수업에서 쫓겨난 대목이 나온다. 난초의 긴 잎을 조심스럽게 공들여 그리라는 선생님의 말을 무시하고 단번에 쳤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김지하는 이후에도 ‘난초는 쳐야 한다’는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 ‘치다’는 점이나 선을 찍거나 긋는다는 뜻의 동사다. ‘경을 치다’라는 욕도 경(경)을 찍는다는 뜻이다. 경형(경刑)은 문신을 새기는 형벌, 자자형(刺字刑)을 말한다.

▷요즘에야 문신을 패션으로 여길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 그래도 한번 새긴 문신은 평생을 간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다. 자자형이 무서운 것은 이 때문이다. 얼굴이나 팔뚝에 ‘도둑’이라는 글자가 새겨지면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했다. 옛날에 자자형 받은 죄인들이 따로 모여 살았던 이유였을 것이다. 서양에 ‘주홍글씨’가 있다면 동양에는 ‘검은 글씨’가 격리의 표시였던 셈이다. 사이버 세상이 활짝 열린 오늘날에는 ‘디지털 주홍글씨’로 속앓이를 하는 이들이 많다.

▷기업들이 지원자의 사이버 평판까지 조회하자 취업 준비생들이 문제가 될 만한 과거 인터넷 기록을 찾아 지워달라고 디지털 장의사를 찾는다고 한다. 미국이 비자 신청을 받을 때 지난 5년간 사용한 적이 있는 모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아이디(ID)를 내라고 하면서 유학 준비생들도 혹시 의심받을 수 있는 글과 사진을 지우느라 법석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인터넷 세상엔 망각이 없다’는 말은 이제 현대의 격언이 될 법하다.

▷국내 처음으로 2008년 디지털 장의업체 ‘산타크루즈 컴퍼니’를 세운 김호진 대표는 미성년자들이 삭제를 요청하면 돈 대신 사회봉사 10∼20시간 확인서를 끊어오라고 한다. 한때의 잘못된 판단으로 누드 영상이나 사진이 퍼져나가는 바람에 어린 목숨을 끊는 사례를 봐왔기 때문이다. 그는 문의는 많지만 계약이 적어 5년째 적자라고 했다. 그래도 국내엔 20여 개 업체가 영업 중이다. 작년 고용정보원은 디지털 장의사를 ‘5년 안에 뜰 신(新)직업’으로 꼽았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
#디지털 장의사#산타크루즈 컴퍼니#디지털 주홍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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