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 한물갔다”는 말, ‘땀’으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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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21>늘 푸른 프로야구 삼성 이승엽

약속 시간은 오후 1시였다. 9일 정오 무렵 동대구역에서 택시를 잡아탄 기자는 “대구야구장에 가달라”고 했다. 흘낏 뒤를 돌아본 운전사는 “오늘 야구 아직 멀었는데” 했다. 프로야구 삼성 홈게임이 시작하려면 6시간도 더 남았기에 하는 소리였다. 그 이른 시간에 삼성 이승엽(38)은 롯데와의 경기에 대비한 워밍업을 하고 있었다. “나이를 먹으니 몸을 충분히 풀어야 한다. 20대 때보다 3시간 정도 빨리 운동장에 나온다.” 마흔을 바라보면서도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이승엽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서서히 달궈져 오랫동안 식지 않는 무쇠 뚝배기와 마주 앉은 기분이었다.

○ 마음이 몸을 지배한다

이승엽은 6월 한 달 동안 타율 0.330, 9홈런, 23타점을 기록했다. 13일 현재 시즌 타율 0.302, 19홈런, 60타점. “회춘했느냐”고 묻자 “예전의 내가 아닌 현재 기준으로 보면 성공적이다. 눈에 드러나는 기록보다도 슬럼프를 관리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스트레스도 기분 좋게 받고 있다”며 웃었다.

지난해 이승엽은 부진에 허덕였다. 류중일 삼성 감독은 고개 숙인 이승엽 기용을 고집하면서 ‘의리 논란’에 휩싸였다. “한물갔다”는 평가를 극복하는 데는 결국 땀밖에 없었다. “겨울 훈련 때 마음을 다잡았다. 방망이를 세우던 과거 타격 자세를 눕혀서 치는 간결한 스윙으로 고치면서 정확한 임팩트가 가능해졌다.”

요즘도 그는 대형 거울 앞에 자주 선다고 한다. 미세한 동작의 변화까지 점검하기 위해서다. 코치들도 껄끄러워할 ‘거물 선수’이지만 그는 몸을 낮춰 코치들에게 “작은 조언이라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중심타선에서 한발 물러난 붙박이 6번 타자가 된 이승엽은 “이 정도면 됐다고 안주하는 순간 선수 생명은 끝난 것이다. 마음이 몸을 지배한다”고 했다.

○운이 중요하지만 노력하면 대가는 온다

이승엽은 “아버지로부터 넌 천운을 타고났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중요한 갈림길마다 내린 결정이 잘 맞아떨어진 경험 때문이란다. “고교 졸업 후 우여곡절 끝에 대학 진학 대신 프로를 선택했다. 대학에 갔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 그가 1995년 삼성에 타자가 아닌 투수로 입단했다는 것은 익히 아는 얘기다. “당시 타자 전향을 권유받고는 한 달 정도 실랑이를 벌이던 와중에 부상으로 팔꿈치 수술을 받게 됐다. 재활 기간 동안만 방망이를 잡겠다고 한 게 여기까지 왔다.”

스포츠에서 흔히 성공의 요소로 부각되는 ‘운칠기삼(運七技三)’을 언급한 이승엽. 그래도 그는 “노력한 만큼 대가는 온다는 확신이 있다. 평소 노력을 해야 막상 기회가 왔을 때 잡는다. 여기에 인성, 남에 대한 배려심도 중요하다”고 했다.

태어나 28년 동안 고향 대구를 떠나 본 일이 없다는 이승엽은 2004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해 8년을 보냈다. 일본에서 그는 2군에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거액의 몸값을 받으면서도 대주자, 대수비로 뛰었다. 일본 코치에게 “프로가 이런 것도 모르냐”는 면박까지 들었다. “일본에 있던 기간 가운데 5시즌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집에서 TV로 경기를 보고 있는데 아들이 아빠는 야구 안 하고 여기서 뭐하냐고 하더라.(웃음) 그래도 (그 시간이) 허송세월은 아니었다.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인내심,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한 소중한 순간이었다. 앞으로 뭘 하든 큰 밑천 건졌다고 생각한다.”

○박수 받을 때 계속 뛰어야 한다

삼성은 지난해 3년 연속 통합 우승한 뒤 올 시즌에도 단독 선두를 질주하고 있다. 이승엽은 “삼성은 제일주의인데 야구는 2002년 첫 우승할 때까지 2등 신세였다. 개개인은 뛰어난 데 모래알이란 지적이 많았다. 요즘은 스타성은 떨어질지 몰라도 팀워크가 단단하다”고 자평했다. 또 “우린 선수단 미팅도 거의 안 한다. 다른 팀 코치가 ‘너흰 야구를 알고 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며 자랑했다.

그에게는 많게는 16세나 어린 동료들과의 관계 설정도 중요한 과제이다. “나하고 감독님이 13세 차이인데. 후배들은 내가 얼마나 어렵겠나. 농담도 자주 하고 살갑게 대하려 하고 있다.”

이승엽은 올림픽, 아시아경기 같은 국제대회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후배들의 병역 혜택을 거들었다. 류중일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9월 인천 아시아경기에서 그의 역할이 주목되는 이유다. 국민타자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까지 갖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승엽은 손사래를 쳤다. “앞으로 태극마크 다는 일은 없다. 뛰어난 후배들이 많다. 난 경험만 있을 뿐이다. 홈에서 하니까 꼭 금메달을 따줬으면 한다. 소속팀은 달라도 하나로 뭉쳐야 한다. 아시아에서 2등은 용납할 수 없다.”

야구장에서 더 이룰 게 없어 보이는 그이지만 두 가지 구체적인 목표를 밝혔다. 스스로 ‘꿈의 기록’이라고 규정한 통산 400홈런과 2000안타 달성이다. 이를 위해 41세가 되는 2017년까지는 유니폼을 벗지 않겠다고 했다. 국내 리그에서 홈런 377개, 1637안타를 기록하고 있기에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한 시즌에 56개의 홈런을 친 것보다 7년 연속 홈런 30개를 돌파한 데 자부심을 느낀다. 꾸준한 페이스는 사건, 사고, 부상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한 그의 땀과 눈물이 밴 대구구장은 1948년 개장돼 낙후된 환경으로 악명이 높다. 삼성은 2016년 새 홈구장을 개장한다. 새로운 안방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싶은 포부도 크다. 이승엽은 최근 3만 명 가까이 운집한 잠실구장에서 홈런 쳤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팬들이 일제히 내 이름을 외치더라. 이승엽, 이승엽….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야구 참 재밌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다시 흥분에 빠져 있었다. 그에게 은퇴라는 단어는 아직 먼 훗날 얘기였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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