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 종가 신정 차례상엔 떡국-茶-과일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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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대표 성리학자인 윤증 후손들, “차례상 비용 3만원도 안들어”
기제사땐 과일-나물-생선 한토막, “제물보다 마음” 선조 유지 받들어

“설 차례상요? 우리 집안은 이미 신정에 차례를 지냈는데요.”

25일 조선시대 대표적 성리학자인 명재 윤증(1629∼1714) 종가의 차종손인 윤완식 씨에게 설 차례 계획을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는 “설 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며 “신정 차례상에는 과일과 차만 올린다”고 했다. 조선시대 선비를 대표하는 명재 종가가 설을 지내지 않는 데다 신정 차례상에 다과만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명재는 왕에게서 우의정 등 높은 벼슬자리 부름을 받고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 보니 살림은 늘 궁핍했다. 어려운 살림에도 제사를 지내야 할 후손들을 위해 명재의 유지(遺旨)는 분명했다.

‘제사를 간소하게 하라. 부녀자들의 수고가 크고 사치스러운 유밀과(약과)는 올리지 말라. 기름을 쓰는 전도 올리지 말라.’ 집안의 제사상 크기는 가로 99cm, 세로 68cm로 정해져 있어 음식을 많이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 없다고 한다. 윤 씨는 “우리 종가의 특징은 여성의 수고를 덜어주고 제물보다 마음을 중시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명재 종가의 제사상에 올라가는 과실은 대추와 밤, 감 등 딱 세 가지다. 대(代)의 이어짐을 의미하는 뿌리와 줄기, 잎을 활용한 3색 나물을 올리는데, 이조차 따로따로 담지 않고 한 그릇에 담는다. 조기 역시 통으로 올리지 않고 한 토막만 올린다고 윤 씨는 전했다.

설 차례상은 기일제(조상이 돌아가신 기일에 지내는 제사)상보다 더 간소하다. “차례는 차(茶)를 올린다고 해서 차례예요. 차례상에는 떡국과 과실 세 가지, 식혜, 녹차 정도만 올려요.” 윤 씨는 “만약 조상이 커피를 좋아하셨다면 커피를 타서 올릴 수도 있을 것”이라며 “차례상 비용은 3만 원이 채 안 든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김시덕 교육과장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통 차례상은 명재 종가처럼 간소했다. 김 과장은 “차례에 대해 조상들이 남긴 규칙은 ‘과일과 제철음식 하나’가 전부”라며 “설 차례 때 기일제를 함께 드린다면 모를까 기일제를 따로 지내면서 차례상을 제사상처럼 차리는 것은 과하다”고 말했다. 차례상은 명절 때 자손들만 맛있는 음식을 먹기 죄송해 설이면 떡국, 추석이면 송편, 단오면 쑥떡 등을 한 그릇 담아 차와 함께 조상에게 올린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명재 종가처럼 설 대신 신정을 쇠는 건 문제가 없을까. 명재 종가가 신정을 쇠게 된 것은 윤 씨의 증조부인 윤하중 선생의 결정 때문이었다. 천문학자인 윤하중 선생은 1938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역서에 관한 고서란 고서는 모두 읽은 역학계의 거성(巨星)’으로 소개된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윤 씨는 “천문학을 공부한 증조부는 양력이 음력보다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집안의 제사와 생일을 모두 양력에 맞춰 지내도록 했다”고 말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승준 고문서연구실장은 “차례든 제사든 전통은 시대와 집안에 따라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다”며 “모든 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강조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명재 종가 신정 차례상#떡국-차-과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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