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donga.com

무대 대신 침대로 내몰려… 산산조각 난 한류스타의 꿈
더보기

무대 대신 침대로 내몰려… 산산조각 난 한류스타의 꿈

위은지 기자 , 조은아 기자 입력 2018-03-01 03:00수정 2018-03-01 03:54
뉴스듣기프린트
트랜드뉴스 보기
[이주여성들 ‘외칠 수 없는 미투’]<下> 인신매매 통로된 예술흥행비자

“너도 한국에서 가수 될 수 있어. 돈 많이 벌게 해줄게.”

필리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던 여대생 케이트(가명·22) 씨. 그는 2년 전 지인 소개로 만난 한국 기획사 관계자의 말을 듣고 들떴다. 관계자가 보여준 사진 속엔 젊은 여성들이 ‘한류 가수’처럼 무대에 올라 노래하고 있었다. 재미 삼아 처음 참가해 본 오디션이었는데 기획사는 케이트 씨를 합격시켰다.

케이트 씨는 기획사와 ‘엔터테이너’ 계약을 한 뒤 예술흥행비자(E6-2)를 받아 한국에 왔다. 국내 호텔과 클럽에서 가수나 댄서로 일할 수 있는 비자다. 하지만 그가 일하게 된 서울 외곽의 한 외국인 전용클럽의 40대 남성 사장은 무대에 설 기회를 한 번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손님들에게 술을 팔게 했다. 클럽 근처의 숙소 입구에선 폐쇄회로(CC)TV가 케이트 씨를 늘 지켜봤다.


일한 지 석 달째 되던 어느 날, 클럽 사장은 “내 친구가 너랑 저녁 먹고 싶다고 한다”며 그를 데리고 나갔다. 사장의 친구는 “영화나 같이 보자”고 해놓고 한적한 동네의 모텔로 데려가 성폭행을 했다. 사장의 친구는 “사실은 (너를 밖에서 따로 만나는 조건으로) 네 사장에게 돈을 줬다”고 했다. 지난달 11일 기자와 만난 케이트 씨는 “내가 할 수 있었던 최대의 저항은 가짜 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거부하는 것뿐이었다”고 말했다.

○ 무대 꿈꿨는데 침대로

‘가수의 꿈’을 안고 한국에 온 이주여성들 중엔 케이트 씨처럼 강제 성매매에 내몰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업주의 24시간 감시로 업소를 벗어나기 어렵다. 업소에서 도망을 치면 기획사 측이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신고해 비자 효력을 정지시킨다. 기지촌 주변 이주여성 인권단체 두레방 관계자는 “본국의 가족들에게 돈을 꼬박꼬박 보내야 하는 여성이 많고, 평소 업주가 ‘도망가면 사람을 풀어 찾아낼 것’이라고 협박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도 당장 현장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다른 클럽에서 일한 필리핀 여성 엘라(가명·25) 씨도 주변 동료들의 피해 사례를 털어놨다. 이 클럽 사장은 음료 한 잔을 팔 때마다 1포인트씩 줬는데 매달 350포인트를 채우게 했다. 사장은 “성매매를 하면 한 번에 20포인트를 채울 수 있다”며 포인트가 낮은 여성들에게 성매매를 강요했다. 엘라 씨는 “포인트를 채우지 못하면 쉬는 날도 없었다. 실적이 계속 부진하면 손버릇이 나쁜 한국인 손님이 많은 클럽으로 보내겠다거나 본국으로 쫓아낸다고 협박했다”고 말했다.

주요기사

이처럼 예술흥행비자가 본래 취지와 달리 성매매 여성을 공급하는 창구로 악용되자 정부는 2016년 비자 심사와 공연장소 관리를 강화하는 대책을 내놨다. 2014년 3800여 명에 달했던 예술흥행비자 소지 국내 체류자 수가 2017년 2400여 명으로 감소한 것도 관리 강화의 결과다. 하지만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소라미 변호사는 “여성들의 입국 절차가 까다로워져도 일하는 환경이 달라지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관계 부처가 외국인 전용 유흥업소 합동점검을 실시하고 있지만 예고 후 점검에 나서 업소가 대처할 시간을 준다는 비판도 나온다.

최근 해외 여성 모집 브로커들은 무비자나 관광비자로 입국해 일자리를 찾는 여성들을 노리고 있다. 싱글맘인 20대 태국 여성 티다(가명) 씨는 지난해 ‘한국에 돈 잘 버는 마사지사 자리가 있다’는 페이스북 글에 속아 한국에 왔다가 피해를 본 경우다. 그는 대구의 마사지업소에 감금돼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태국의 인신매매 방지 시민단체 AAT의 연락관 투앙시리 카니싸나다 씨는 “피해 여성들은 24시간 감시당하면서 성매매를 강요당한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태국 법무부 산하 특별조사국(DSI)은 지난해 “한국에서 마사지사 취업은 불법이니 속지 말라”는 경고까지 하고 나섰다.

○ 피해 여성이 오히려 범죄자로 둔갑

전문가들은 일터에서 성매매를 강요당한 여성들을 보호하는 장치가 허술하다고 입을 모은다. 경찰이 성폭력 피해 수사에 나섰을 때는 이미 이들의 비자가 만료된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로 쫓겨날 수밖에 없다. 피해 여성들이 업주나 브로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추방이 잠시 유예되지만 소송이 끝나면 출국해야 한다. 성매매 피해 여성들이 성매매처벌법에 따른 범죄자가 되기도 한다.

박미형 유엔 국제이주기구(IOM) 한국대표부 소장은 “한국 여성들이 ‘미투(#MeToo·나도 당했다)’에 동참한 건 이제야 사회가 여성들의 피해 사실에 귀를 기울이는 분위기가 됐기 때문”이라며 “이주 여성들도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사회가 이들을 피해자로 인정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것이란 걸 알기에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다”고 지적했다.

소 변호사는 “피해 여성이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체류할 자격을 보장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 장기적으로는 ‘인신매매피해자보호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위은지 wizi@donga.com·조은아 기자
#이주여성#미투#인신매매#한류#성폭력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주요뉴스

1/3이전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