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의 글로벌 인사이더] 집나간 매너를 찾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7일 12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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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 많은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관광객 많은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정미경 기자
정미경 기자
미국에 두 번 살았다. 1990년대 유학 가서 공부할 때와 2010년대 전반 특파원으로 일할 때다. 우연히 모두 미국 민주당 정권 때다.

미국 같이 안정된 사회는 모든 것이 천천히 변한다. 길거리 모습도 사람들의 차림새도 언제나 비슷하다. 한국처럼 모든 게 휙휙 빨리 지나가는 사회에 살던 사람은 미국에 대해 ‘이렇게 정체된 사회가 어떻게 세계 최강 국가인가’하고 생각하기 쉽다. 아마 ‘미국의 기술은 변해도 원칙과 철학은 변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래도 1990년대 미국과 2010년대 미국은 크게 변한 게 있었다. 사회적 매너와 에티켓이 크게 줄었다는 거다. ‘생큐(Thank you·감사)’와 ‘쏘리(Sorry·미안)’의 나라라는 미국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친절보다 내가 편한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스타벅스에서 보면 10명 중 8명 정도는 그냥 ‘카페라테 달라’식의 명령식 주문을 한다. 문장 속에 부탁한다는 의미의 ‘플리즈(Please)’가 들어가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생큐’와 ‘플리즈’의 실종. ‘생큐’ 대신에 ‘갓 잇(알았다)’이라는 표현을 점점 더 많이 듣게 된다.

“즐거운 쇼핑 하셨습니까.” 워싱턴 특파원 시절 집 앞 슈퍼마켓에서 계산대 점원으로부터 가끔 들었던 말이다. 이 때마다 놀라웠던 건 요즘 미국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서 이런 말을 듣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이(안녕)”하며 한마디 대화라도 나누면 그래도 나은 편. 손님과 점원은 거의 눈도 마주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점원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손님은 돈 낼 준비만 한다. 친절한 인사말을 건네는 점원을 만나면 오히려 손님이 더 당황하게 된다.

사회 예절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요즘 미국 사회를 이렇게 정의한다. 지난해 여론조사기관인 라스무센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6%는 “미국이 점점 더 무례하고 덜 친절한 나라가 돼가고 있다”고 답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미국이 격식을 차리지 않는 ‘캐주얼한 사회’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복잡해지는 사회에 대한 심리적 대응 메커니즘으로 사람들이 캐주얼한 옷을 입고 캐주얼하게 대화를 나누고 행동하는 추세가 강해지면서 예절을 생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으론 미국에서 매너가 사라지는 것은 험악하고 무례해지는 정치문화와 더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레그 스미스 조지아대 심리학 교수는 2000년대 들어 미국 정치권에서 갈등과 대립의 문화가 본격 형성되면서 예절을 경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9·11테러와 이에 따른 미국의 극심한 이념적 대립이 매너 실종 현상을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정치권에서 쏟아지는 갈등의 언어를 듣다 보면 ‘과연 어느 수준까지 낮아질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한번 논란이 생기면 찬성파와 반대파가 격렬하게 맞붙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을 벌이며 갈등을 확대 재생산한다. 사생결단식 대결에 질려 아예 정치를 포기하고 떠나는 정치인도 많다.

특히 선거 때가 되면 갈등의 수위는 한층 높아진다. 지도급 인사들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이를 지켜본 국민은 지금까지 당연하게 지켜왔던 사회적 예절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 된다. 국민은 처음에는 놀라지만 ‘저런 무례함도 통한다’는 학습 효과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예절 수준을 하향 조정해 나갈 것이다.

사회적 예절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나라의 국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이기도 하다. 막말과 갈등 조장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 미국의 예의범절 수준이 내려갈 것은 뻔하다. 한국은 조기 대선이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준비 기간이 짧은 만큼 선거전은 과열되고 여러 부작용을 낳을 것이다.

앞으로 양국 정치권에서 펼쳐질 무례한 말과 행동의 향연이 국민 예절 수준 하락에 얼마나 기여할지 비교하며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왠지 서글픈 작업이 될 것 같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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