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박민우]테러보다 무서운 이집트 교통지옥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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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연초부터 액땜을 제대로 했다. 극심한 두통에 서둘러 향한 종합병원에서 골치 아픈 진단이 나왔다. 젊은 나이에 대상포진이라니. 약을 처방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이집트의 황당한 교통안전 시스템 때문이다.

방문했던 카이로 나일 강변의 종합병원은 꽤 컸다. 규모나 위치를 봤을 때 우리나라로 치면 올림픽대로변에 있는 서울아산병원쯤 될까. 병원을 나와 길을 건너려 하는데 병원 앞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육교가 없었다. 도로에 낮은 분리대가 이어져 있어 유턴조차 되지 않는 탓에 반대편에서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들은 왕복 8차선 규모(차선이 없음)의 도로를 눈치껏 가로질러야 했다.

이집트는 교통 무법지대다. 웬만해선 차선, 인도, 신호등, 횡단보도를 찾아볼 수 없다. 이집트인 친구들은 길을 건널 때 “절대 뛰지 말고 여유롭게 걸으면서 마주 오는 운전자와 눈을 마주쳐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대상포진의 고통을 견디면서 시속 80km로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를 건너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이집트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교통사고 건수는 약 1만4000건. 교통신호와 과속방지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데다 안전띠 규제 등 교통안전 법규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어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도로 유지보수 작업도 제때 이뤄지지 않아 곳곳에 요철이 도사리고 있다. 지난달에는 카이로와 남부 지역 미니아를 연결하는 도로에서 차량이 연쇄 추돌하면서 최소 11명이 숨지고 32명이 다쳤다.

대중교통도 안전하지 않다. 지난해 8월에는 이집트 남부 베니수에프주에서 다리를 건너던 소형 버스가 트럭과 충돌했다. 카이로에서 승객 62명을 태우고 미니아로 향하던 이 버스는 나일강으로 추락해 14명이 사망했다.

장거리 열차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지난해 7월 알렉산드리아 출장을 위해 처음으로 이집트 열차를 타 본 이후로 다시 열차에 탑승하기가 꺼림칙하다. 정확히 보름 후에 알렉산드리아 인근에서 41명이 사망하고 179명이 다치는 대형 열차사고가 터졌기 때문이다. 카이로에서 출발한 열차가 역에 정차 중이던 열차를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그대로 들이받았다. 당시 사고 목격자들에 따르면 두 열차의 머리 칸과 꼬리 칸이 부딪히면서 공중에 피라미드 모양을 만들었을 정도로 충돌이 강력했다.

이집트에서는 부실한 선로 관리와 취약한 안전 기준 탓에 매년 1000건이 넘는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달 28일에도 베히라주에서 여객 열차가 선로를 이탈해 화물 열차와 부딪히면서 최소 16명이 숨지고 40명이 다쳤다. 사고 후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이집트 전역의 철도시스템 점검을 지시하면서 “낙후된 철도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2000억∼2500억 이집트파운드(약 12조∼15조 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집트 정부는 현재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고 있어 이 정도의 자금을 투입할 여력이 없다.

놀랍게도 이런 이집트의 교통사고 사망률이 중동 지역에선 낮은 편에 속한다. 이집트의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는 12.8명으로 중동 21개 국가 및 지역 가운데 가자지구(5.6명) 바레인(8.0명) 다음으로 낮았다. 역내에서는 이란(32.1명)과 사우디아라비아(27.4명)의 사망률이 높았다. 리비아(73.4명)는 세계에서도 압도적으로 교통사고 사망 위험이 높은 국가로 꼽혔다.

교통안전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지역별로 보면 유럽(9.3명)은 최근 10년간 사망률이 감소하는 추세였지만 상대적으로 가난한 아프리카(26.6명) 중동(19.9명)은 여전히 높은 수준의 사망률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저소득 국가는 전 세계 자동차의 54%를 보유하고 있지만 교통사고 전체 사망자의 90%가 이들 국가에서 나온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015년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전 세계에서 매년 125만 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25초마다 누군가의 소중한 삶이 도로 위에서 허무하게 끝나는 셈이다. 교통사고는 전 세계 청년층(15∼29세) 사망의 첫 번째 원인이기도 하다. 교통사고로 다치는 사람은 연간 5000만 명에 달한다.

교통안전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개발도상국은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다. 교통사고로 가족이 죽거나 다친 가구는 절대 빈곤층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커진다. 세계은행(WB)은 도로 안전에 투자하지 않는 국가는 24년간 잠재적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7∼22%를 놓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도로 위의 국민이 안전해야 경제도 발전한다.
 
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minwoo@donga.com
#이집트#교통 무법지대#교통안전#교통사고#개발도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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