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강한 대학]<12>美 웨슬리안大

  • 입력 2006년 5월 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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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지난달 16일 오후 7시. 미국 웨슬리안대 ‘월드 뮤직 홀’에선 낯선 이방인의 귀에 익은 신명나는 가락이 울려 나온다. 머리를 박박 민 벽안(碧眼)의 상쇠가 생활한복에 맨발로 꽹과리를 연방 두들기며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20여 명의 흑인 백인 동양인 학생들도 장구 징 북을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빠른 리듬에 몰입해 있다.

‘코리안 드러밍 앙상블’(풍물). 이 대학 동아시아학과의 정식 커리큘럼이다. 교수는 뉴욕 풍물단 대표인 육상민(54) 씨. 20명을 뽑는 기초반은 학기마다 50여 명이 몰려 오디션을 통해 탈락시킬 정도로 인기가 좋다.

한국 유학생이래야 20여 명에 불과한 미국 동부 코네티컷 주의 작은 마을 미들타운에 위치한 이 대학에서 풍물이 정식 과목이 된 것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웨슬리안대의 교육 철학을 잘 보여 주는 사례다. 》

감리교도가 세운 학교에서 랍비가 채플을 가르친다?

#1

웨슬리안대 올린 도서관 로비. ‘게이, 레즈비언, 양성(兩性), 성전환을 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이라는 주제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흑백사진과 함께 백인 흑인 동양인 등 전 세계의 ‘성적(性的) 소수’의 절절한 목소리가 담긴 편지가 학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웨슬리안대는 동성애 문제를 인권과 다양성의 시각에서 접근한다. 커밍아웃한 학생들은 다른 학생과 똑같이 어울린다. 기숙사를 배정할 때도 학교 측은 레즈비언 여학생까지 고려한다. 한국 유학생인 이제원(1학년·영화 연극전공) 씨는 “입학 직후 ‘게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썼다가 다른 학생들과 논쟁을 벌인 적도 있다”고 말했다.

#2

대학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인 ‘메모리얼 채플’ 교회당(사진). 분명히 십자가가 서 있지만 집회 일정을 알리는 게시판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채플 인도자들이 ‘이맘’ ‘랍비’ ‘신부’ ‘목사’ 등 다양하기 때문이다. 웨슬리안대는 기독교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이름을 따 감리교도들이 설립한 학교다. 하지만 학교의 교육철학인 다양성의 원칙 앞에는 종교도 예외는 아니다.

#3

메모리얼 채플 교회당 게시판. 미들타운=윤영찬기자

‘당신은 누구를 위해 세금을 내는가.’ 학생회관 앞 게시판에는 반전(反戰) 집회를 알리는 전단이 부착되어 있다. “미국에는 4300만 명이 건강보험이 없는데 핼리버튼사(딕 체니 부통령이 고문으로 있는 석유회사)가 이라크전에서 국방부와 체결한 계약 액수는 무려 43억 달러”라는 비난과 함께 집회 날짜와 장소(도서관 광장)를 알리는 격문이 붙어 있다.

1960년대 미국을 지배했던 ‘리버럴’은 이제 마이너리티로 전락했다. 1968년 이후 치러진 10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적인 공화당 후보가 7번, 진보적인 민주당 후보가 3번 당선됐다. 미국 ‘리버럴’의 마지막 보루는 상아탑과 언론이라는 자조까지 흔히 들을 수 있다.

웨슬리안대는 미국의 이념적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그러나 지금은 퇴조기에 접어든 리버럴의 전통이 가장 강한 대학이다.

“사고의 장벽 허물어라” 4개 학문 동시에 전공

다양성과 창의성에 기반을 둔 독특한 전통은 웨슬리안대를 미국 내 217개 리버럴 아트 칼리지 중 최고 수준으로 만들었다. 특히 학과와 교과목의 두꺼운 벽을 깨고 학문 간 협업(協業)을 강조하는 ‘학제교육(interdisciplinary education)’은 이 학교의 핵심 전략이기도 하다.

이 학교 CSS(College of Social Studies)에 다니는 학생들은 주위 사람들이 자신의 전공을 물을 때마다 곤혹스럽다. 전공이 4개라고 말하면 모두 고개를 갸우뚱한다. 하지만 실제로 사회철학 정치 경제 역사를 전공한다. 토머스 홉스와 존 로크, 장 자크 루소의 사회사상,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를 망라하는 경제사, 프리드리히 니체와 미셸 푸코 등이 포함된 철학사, 니콜로 마키아벨리 등의 정치사를 모두 함께 공부한다.

CSS에는 전담 교수가 없다. 정치 경제 사회 철학 역사학과에서 차출된 교수들이 위원회를 구성해 매 학기 강의 과목을 결정한다.

2004년 영화학과 교수들과 분자생물 및 생화학(MB&B), 화학과 교수들이 토론을 거쳐 만든 ‘과학과 SF’ ‘인지주의와 영화’ 등의 과목은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내년 봄에는 자연과학대 및 영화학과 교수 학생들이 과학 다큐멘터리를 직접 만드는 프로그램도 개설한다.

환경학과 역시 학제교육의 원칙이 적용된다. 이 대학의 경제학과 게리 요헤 교수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 실무그룹 의장을 맡고 있다. 철학과의 로리 그룬 교수는 환경윤리의 전문가다. 또 생물학과의 배리 처노프 교수는 환경계량분석의 대가이고, 수학과의 대니 크리장크 교수는 환경 데이터 매트릭스 분석의 전문가다.

이들은 거의 매년 환경 문제에 관한 학술 행사를 열고 있고, 환경학과 교수들과 함께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 분야 학생들을 어떻게 환경 문제에 접근시킬 것인지 고민한다.

대학 측은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도 자연과학 과목을 수강하도록 적극 권장하고 있다. 자연과학-수학대의 데이비드 베버리지 교수는 학교 측에 제출한 ‘과학과 예술’ 과목 기금신청서를 통해 “‘과학과 모더니즘’ ‘과학과 영화’와 같은 학문 간 연계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런 교육 방식은 전문화된 지식을 요구하는 세계화 시대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밀물처럼 밀려드는 세계화의 태풍 속에서도 이 학교는 ‘종합적 인간의 양성’이라는 교육 이념을 더욱 강화했다.

진보적 학풍을 갖고 있는 웨슬리안대는 다양성과 창의성을 교육 철학으로 내세우고 있다. 학생의 요구에 의해 정식 커리큘럼으로 인정된 우리나라의 풍물놀이는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과목이다. 미들타운=윤영찬 기자

“폭발적인 지식, 글로벌 경제, 기술적 진보 속에서 ‘우리가 길을 잃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웨슬리안대 졸업생들은 변화와 다중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지적인 원칙에 기반한 교양교육은 학생들이 이 같은 세상을 잘 살아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을 제공할 것이다.”(1997년 ‘21세기를 위한 웨슬리안 교육’ 지침서)

실제로 학계, 영화 및 방송, 언론, 금융 등 각계에 포진하고 있는 동문의 면면에서 웨슬리안대의 ‘학문 융합적’ 전통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돌연변이’ ‘바이러스’ 같은 의학전문 스릴러로 유명한 의학도 출신 소설가 로빈 쿡, 워싱턴포스트지 최고경영자(CEO)인 캐럴라인 리틀이 동문이다. 영화 ‘아마겟돈’, ‘진주만’ ‘더 록’ 등을 감독한 마이클 베이, ‘세러니티’ ‘뱀파이어의 유혹’을 감독한 조스 웨던도 이 학교를 나왔다.

1831년 감리교도들이 설립한 웨슬리안대는 재학생의 71%가 고교 성적 상위 10%이내에 드는 인재들이다. 미국 대학 입학 사정 기준인 대학입학시험(SAT) 성적은 평균 1400점이고 학비는 연간 4만4432달러로 결코 싸지 않다. 다만 재학생의 45%가 1인당 평균 2만3375달러의 장학금을 받고 있다.

이 학교는 또한 1999년 설립된 프리먼 장학재단을 통해 동아시아 11개국에서 각 2명씩 선발한 인재를 무상 교육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으로 입학한 한국인 유학생은 지금까지 모두 14명.

입학 담당 낸시 마이슬란 학장은 “한국 학생들은 학업성적이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며 “다만 학교 밖에서 벌어지는 활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래도 세계화의 첨병인 미국에서 전문가가 아닌 ‘전인적 인재 양성’은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은 계속됐다.

동아시아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있는 스티븐 에인절 소장의 답변은 확신에 차 있었다. “미국 사회는 창의적인 인재를 필요로 하고, 이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미들타운(미 코네티컷 주)=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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