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눈]외환위기 이후 20년, 남겨진 과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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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현기 KEB하나은행·하나금융경영연구소장
배현기 KEB하나은행·하나금융경영연구소장
1997년 12월 3일은 당시 ‘제2의 국치일’이라고 불렸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인해 대한제국의 모든 주권을 일제에 빼앗겼듯이, 그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 개시되면서 대한민국 경제주권(통화, 재정)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 우리는 2001년 8월 23일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전액 상환하면서 관리체제에서 조기 졸업했다. 해외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런 조기 졸업이 세계경제 역사상 유례가 없다며 감탄했다. 그렇다면 구제금융 이후 정확히 20년이 지난 현재 우리 경제는 당시 제기됐던 문제들을 모두 해결했을까?

당시 경제연구소 이코노미스트였던 필자는 컴퓨터 파일을 뒤져서 구제금융 직후 작성했던 칼럼을 어렵게 찾아냈다. 제목은 ‘한국주식회사의 붕괴와 IMF의 신탁통치’였다. 지금 보면 참 자극적인 표현이다. 1986년 ‘3저 호황’ 이후 거칠 것이 없던 한국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국민으로서 참담함을 느꼈다. 또 이코노미스트로서 위기를 경고하고 대책을 제시하지 못한 데서 오는 무력감도 매우 컸다.

그 칼럼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97년 위기는 외화 유동성의 고갈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는 주로 금융기관의 외화 차입으로 보전됐는데, 외국 금융기관들이 만기를 연장하지 않고 회수에 들어가면서 유동성 위기에 빠진 것이다. 외국의 불신은 국내 금융기관들의 막대한 부실채권에서 비롯됐고, 부실채권은 재벌들의 잘못된 의사결정과 이를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잘못된 대출관행이 원인이었다. 부실사업의 구조조정도 이뤄질 수 없는 구조였다.

위기 극복을 위해선 금융개혁, 기업의 지배구조 개혁 및 구조조정, 노동개혁과 사회 안전장치의 확보 등이 필요했다. 대출 심사는 관치나 대마불사가 아닌 사업성과 원리금 상환 능력에 기초해야 하고, 부실기업은 퇴출 또는 매각하고 오너의 전횡과 부당한 내부거래를 견제하는 장치를 갖춰야 했다. 상시적 구조조정을 위한 노동유연성의 확보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실업보험 등의 사회적 안전장치가 구비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도 담겼다.

정부는 2002년 6월 말 기준 181조 원(이자 포함)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부실 금융회사들을 퇴출시키고 통폐합했다. 퇴출되지 않은 재벌들은 과도한 부채비율을 낮추기 위해 빅딜, 매각 등 구조조정도 실시했다. 이런 하드웨어 개혁은 신속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문제는 소프트웨어 개혁이다. 하드웨어 개혁과 달리 시간도 많이 걸리고,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기도 쉽지 않은 부분이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 중 하나가 ‘공정경제’일 정도로 재벌의 지배구조와 부당 내부거래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노동유연성 제고와 사회적 안전장치 확보도 여전히 미흡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문제 해결 능력이다. 당시 제시됐던 과제들은 처음 나온 게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기 훨씬 전부터 제기됐던 이슈들이고 금융개혁, 재벌개혁, 노동개혁 관련 기구들도 이미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결론도, 실행도 없었다. 문제는 이견과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한 정치였다. 오죽했으면 외환위기 및 금융위기 이후 가장 유행했던 용어가 ‘말만 있고 실행은 없다’는 뜻의 ‘NATO(No Action Talking Only)’였을까? 과연 지금 우리는 달라졌는가, 아니면 최소한 달라질 준비가 됐는가?

배현기 KEB하나은행·하나금융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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