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흑백사진관… “찰칵, 추억을 찍어줍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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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사장 전통시장 진출기]<3> 부산 국제시장 ‘그리다’ 이충엽 대표

부산 중구 국제시장에서 근대 흑백사진관 ‘그리다’를 운영하는 이충엽 대표. 이 대표는 “흑백사진관으로 부산의 역사를 담은 
국제시장을 다시 살려냈듯이 앞으로도 역사의 숨결을 담은 옛 공간을 지킬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계속 구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손가인 기자 gain@dong.com
부산 중구 국제시장에서 근대 흑백사진관 ‘그리다’를 운영하는 이충엽 대표. 이 대표는 “흑백사진관으로 부산의 역사를 담은 국제시장을 다시 살려냈듯이 앞으로도 역사의 숨결을 담은 옛 공간을 지킬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계속 구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손가인 기자 gain@dong.com
아버지는 신문사의 사진기자였다. 어린 아들은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어디로든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사진 촬영을 나갔다. 아버지가 수집한 오래된 카메라는 어린 아들의 장난감이었다. 아버지는 사진 한 장이 담은 순간의 소중함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아들 역시 사람들의 소중한 순간을 찍는 사진사가 됐다.

72년 역사를 간직한 부산 국제시장을 17일 찾았다. 오래된 열쇠가게와 조명가게가 여전히 남아 있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자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계단을 올라가니 ‘609 청년몰’이라 적힌 색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나왔다. 이곳 한쪽에 마치 1960년대의 사진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근대 흑백사진관 ‘그리다’가 있었다.

이충엽 그리다 대표(31)는 “부산의 역사를 담은 국제시장의 공간이 버려지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에서 ‘그리다’가 탄생했다”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서 지역학을 전공하면서 사라지는 옛 공간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이 과거의 향수를 담은 사진관 ‘그리다’를 만들게 된 가장 큰 계기였다.


이 대표의 사진관이 자리 잡은 국제시장은 그가 나고 자란 부산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곳이다.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남긴 물건을 거래하면서 형성된 국제시장은 한 때 A, B동 2층 규모의 상가를 이뤘던 부산의 주요 상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시장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이에 부산경제진흥원 등은 전통시장의 빈 점포를 활용해 시장을 살리는 동시에 청년 상인들의 창업도 지원하기 위해 지난해 말 ‘글로벌 명품시장 육성 사업’을 진행, 올해 4월경 창업자들의 입주 공모를 받았다. 이 대표는 ‘추억을 담아주는 사진’이라는 아이디어로 이곳에 지원해 운명처럼 카메라를 다시 잡게 됐다.

과거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겠다는 사진관의 취지처럼 ‘그리다’의 인테리어도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꾸며졌다. 이 대표는 국제시장의 옛 모습을 살리고 싶어 기존 상가의 오래된 나무 마룻바닥과 창틀, 벽을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다. 사진관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물건들도 예사롭지 않다. 메인 카메라 외에도 1910년 1차 세계대전 당시 종군 기자가 썼던 카메라 등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던 오래된 카메라가 10여 종 전시돼 있다. 손님들이 앉는 자리 역시 낡은 나무 의자다. 이 대표는 “파는 상품도 중요하지만 그 상품에 걸맞은 스토리텔링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복고풍으로 가게를 꾸몄다”라고 말했다.

그의 독특한 사업 아이디어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딱히 마케팅을 한 적이 없음에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입소문을 탄 ‘그리다’는 부산 국제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필수 관광코스가 됐다. 이 대표는 “사진관의 독특한 콘셉트와 차별화된 분위기가 입소문을 탈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라며 “들어오는 주문을 다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아 하루에 20∼30팀 사전 예약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도 ‘그리다’에는 사진을 찍고자 찾아온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관광객들은 사진 인화를 기다리는 동안 다양한 수제 장식품과 카페 등이 있는 청년몰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때 버려지다시피 했던 공간이 이 대표를 비롯한 청년 창업자들 덕에 다시 북적이고 있는 것이다. 이 대표는 “기존 상인 분들도 국제시장에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좋아하신다”며 “처음 전통시장이 우리 청년 창업자들을 도와줬듯이 우리도 시장을 돕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청년 창업 지원 사업의 대상자는 입주 당시 인테리어 등 공간 연출 전문가를 통해 컨설팅 지원을 받았고, 내년 6월까지 매달 임차료도 지원받는다. 이 대표는 “신구(新舊)의 상생이 옛 공간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청년몰 한쪽에는 그동안 ‘그리다’를 찾은 수많은 사람들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만삭의 몸으로 사진관을 찾았던 한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출산 후 아이를 안고 다시 그리다를 찾아와 똑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었다. 이 대표는 “누군가의 인생에서 큰 의미가 있는 순간을 내가 담아낸다는 게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의 꿈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있는 또 다른 공간을 지켜내기 위해 그는 지금도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다. 이 대표는 “이곳 ‘그리다’를 통해 고향 부산의 역사가 담긴 국제시장을 되살렸듯, 옛 정취를 잃어가고 있는 또 다른 과거의 공간을 찾아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다”고 말했다.

부산=손가인 기자 gain@donga.com
#흑백사진관#국제시장#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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