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달러서 주저앉나]<8>지도층 도덕해이

  • 입력 2003년 7월 8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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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있는 전문 건설업체 A사의 여사장 김모씨(47)는 요즘 토요일이면 도시락 반찬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자기 자녀가 아니라 발주 건설회사 사장 아들이 1주일 동안 먹을 반찬이다. 원청(原請)업체 주요 간부와 가족의 생일을 기억해 선물을 보내고 명절이나 연말에 ‘떡값’을 돌리는 것은 기본이다.

김 사장은 “다른 하청업체는 술집 등에서 모신다지만 나는 여자라서 그런 데도 함께 못 가는데 이렇게라도 해서 잘 보여야 한다”며 “자식들 보기 민망하지만 현실이 그런 걸 어떡하냐”고 되물었다.

▼연재물 목록▼

- <7>인재가 떠나간다
- <6>투자 개방 엇박자
- <5>정치는 5000달러 수준
- <4>하향 평준화의 덫
- <3>'2030'세대 과소비 거품
- <2>노조 강경투쟁의 그늘
- <1>'내몫 챙기기' 집단신드롬

사실 이 정도는 정치권 및 공무원과의 유착과 상납, 대기업과 하청업체간 불평등한 하도급 관행의 역사가 긴 건설업계에서는 약과다. 하청업체에서 ‘대접’을 받는 대형업체 역시 각종 권력기관에 일정 부분의 몫을 지불해야 하는 일도 적지 않다. ‘부패의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는 권력층이 있었다.

▽냉소주의 확산시키는 권력형 부패=한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12위 수준. 하지만 국제투명성기구가 지난해 발표한 국제투명성 지수를 보면 후진국이다. 한국은 102개 조사대상 국가 중 40위에 머물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는 최하위였다.

대부분의 전직 한국 대통령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정경유착 및 거액 수뢰혐의로 본인이 직접 감옥에 갔거나 자식을 포함한 측근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는 사실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올 2월 막을 내린 김대중(金大中) 정부를 보자. 외환위기 후 대부분의 국민이 힘들어하던 시기에 DJ정권은 국민에게 개혁의 구호를 내걸고 고통 분담을 요구했다. 하지만 잇따라 사법처리된 당시 권력층 인사들의 초라한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권력의 단맛에 취해 ‘탈선’했으며 ‘국민의 정부’라는 수사(修辭)가 어느 정도 공허했던가를 잘 보여준다.

이에 앞서 ‘정치군인’ 출신인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에 기업인들에게 수천억원을 거둬들인 혐의로 구속됐다. 특히 전씨는 최근 “재산이 30만원밖에 안 된다”는 말로 실소(失笑)를 자아내게 했다. 권력층의 이런 모습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에서 냉소주의와 허탈감이 확산되지 않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고려대 교수 출신인 윤용(尹溶)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 대표는 “권력기관의 비리에 대한 제보나 탄원 내용을 보면 양과 질에서 모두 심각한 수준에 이른다”며 “고위층과 권력기관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올 5월 전북 익산에서는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씁쓸한 일이 벌어졌다. 시청 공무원 9명이 관급(官給)공사를 맡은 건설업자에게 70여 차례나 뇌물을 요구했다. 이를 참다 못한 기업주는 이 사실을 폭로하겠다며 접대비의 3배인 3억5000만원을 요구하다가 함께 구속됐다.

국무총리실은 지난해 ‘반(反)부패 길라잡이’라는 공무원 교육용 자료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한국의 부패는 △대형화 △만연화 △일상관례화 △구조화라는 4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렇다 보니 각 분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사회적 지위에 따른 도덕적 책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올해 초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실시한 ‘국민 가치관의 현주소’ 조사에서 조사대상 1200명 가운데 77%가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가 심각하다’고 대답했다. 각 분야의 ‘지도층’에 대한 평가도 차가웠다.

성균관대 김민성(金玟成·경제학) 교수는 “최근 한국 사회는 ‘탈(脫)권위’가 아니라 사회적 존경을 받는 계층과 신뢰받는 정치적 리더십이 없는 ‘무(無)권위’가 더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소기업에 군림하는 대기업=대기업은 정치권과 정부에 대해서는 약자(弱者)지만 중소기업과의 관계에서는 강자(强者)로서 횡포를 자주 부린다.

특히 불공정 하도급 관행과 일부 기업인의 회사자금 유용은 기업 및 국가경쟁력 차원에서라도 빨리 없어져야 할 뿌리 깊은 악폐(惡弊)다. 올해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들의 하도급 관련 법률위반 혐의 비율은 62.8%였다. 2000년 조사대상의 81.9%보다 좀 나아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절반이 넘는다.

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시급하고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는 대기업 개혁의 핵심과제는 지배구조 문제가 아니라 중소기업에 대한 횡포를 줄이는 일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연세대 정창영(鄭暢泳·경제학) 교수는 “우량국가와 우량기업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존경받는 지도 계층, 신뢰받는 기업이 필수조건”이라며 “그나마 글로벌 스탠더드에 가장 가까운 대기업들이 앞장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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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지성(知性)은 그리스인, 체력은 켈트인과 게르만인, 기술력은 에트루리아인, 경제력은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인이 어떻게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했을까.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대답은 간결하다.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덕분이다. 귀족과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이 누리는 특권에 걸맞게 의무를 다한 것이 대제국을 건설하는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로마는 부족한 재정을 부유한 계층이 내는 돈으로 충당했고 귀족들은 전쟁터에서 늘 평민보다 먼저 적진에 뛰어들었다.

이처럼 서구 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은 특권을 누리는 계층이 솔선해서 국가를 위한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사회에 부(富)를 환원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50세 이하 귀족 남자 가운데 20%가 전사(戰死)했다. 1982년 포클랜드전쟁에선 앤드루 왕자가 헬기 조종사로 직접 참전하기도 했다. 지도층의 병역 문제가 자주 불거지는 한국의 현실과는 많이 다르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의 기자를 지냈으며 메리트 버슨 마스텔러사(社)의 부사장인 마이크 브린은 “영국에서 특권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말 그대로 의무 사항”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기금모금연합위원회의 소식지인 ‘기부하는 미국’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비영리단체에 대한 기부금은 약 2400억달러였다. 이 가운데 개인의 기부액이 전체의 76.3%에 이른다. 이것 역시 기업의 기부액이 80%를 차지하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지난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상속세와 증여세 폐지를 추진하자 뜻밖에 부호들이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조지 소로스 퀀텀 펀드 회장과 CNN의 창업자 테드 터너 등이 회원으로 있는 ‘책임 있는 부자’라는 단체는 뉴욕 타임스에 반대 광고까지 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은 자신의 재산 가운데 60%를 에이즈 퇴치사업에 쓰고 있다. ‘재산은 신이 잠시 맡긴 것’이라는 기독교적 전통을 엿볼 수 있다.

페덱스 코리아의 데이비드 카든 사장은 “서구 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의식은 기업도 예외는 아니다”라며 “이윤만 추구하는 기업은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한다”고 전했다. 페덱스 역시 70년대 창립 이후 교육 문화 환경 등 여러 분야에서 유나이티드 웨이즈, 세이프 키즈, 적십자 등 봉사기관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票의식한 경제정책은 必敗▼

자선활동을 하고 사소한 문제에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부가 아니다.

경제에 관한 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사회 지도층이 경제 혜택을 누리는 만큼 경제적 풍요로움을 창출하는 데도 기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 지도층 가운데서도 가장 책임이 무겁고 역할이 중요한 것은 정치권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에 이르기까지 정치권의 리더십은 경제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1만달러를 넘어선 이후에는 정치적 리더십이 경제 발전을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했다.

우리는 대우자동차와 조흥은행 매각과정에서 정치논리의 개입이 국민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봤다.

경제 문제를 정치적 고려에 의해 해결하려 하면 비용이 따른다. 그 비용은 국민이 부담한다. 분배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성장률이 떨어지고 실업이 늘어나 사회적 약자들이 피해를 본다.

정치권은 경제 문제를 경제논리로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경제논리에 충실한 정책은 ‘인기 없는 정책’일 때가 많다. 정치 지도자로서는 가장 중요한 자산의 하나인 ‘표’를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에서 주저앉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한 나라의 사례를 보면 국가경제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정치 지도자들이 인기 없는 정책도 과감하게 추진했다.

정치권에만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업인들은 초일류기업에 걸맞은 경영 마인드를 갖춰야 한다. 윤리적이고 투명한 경영을 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현대 사회에서 영향력을 놓고 본다면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의 지도자도 사회 지도층으로 봐야 한다. 이들도 항상 글로벌 경제 환경을 고려하면서 자기 주장을 해야 한다. 70년대식 갈등 해결방식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특별취재팀▼

▽권순활 경제부 차장(팀장)

김광현 천광암 홍석민 고기정

정미경 이은우 신치영 이헌진 기자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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