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달러서 주저앉나]<7>인재가 떠나간다

  • 입력 2003년 7월 7일 18시 10분


코멘트
국내 명문대 대학원(석사과정)을 나와 국내 전자업체에서 근무하던 C씨. 1997년 회사 지원을 받아 미국 UC버클리대로 유학을 떠나 지난해 물리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C씨는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며 6개월째 귀국하지 않고 있다. ‘비전이 없는 한국에서 살지 않겠다’며 회사에는 사표를 제출했다. 서울의 집을 팔아 회사에서 지원받은 1억원 이상의 학비와 생활비를 물어내고 남은 돈은 현재 미국에서 생활비로 쓰고 있다.

▼연재물 목록▼

- <6>투자 개방 엇박자
- <5>정치는 5000달러 수준
- <4>하향 평준화의 덫
- <3>'2030'세대 과소비 거품
- <2>노조 강경투쟁의 그늘
- <1>'내몫 챙기기' 집단신드롬

한국을 떠나는 인재가 늘어나고 있다. 자본이나 단순 노동력이 아닌 ‘고급 두뇌’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들의 해외 유출은 국가경쟁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그런가 하면 고교 졸업생들이 이공계를 외면하면서 산업생산의 토대가 될 기초기술 기반은 취약해지고 있다. 국가발전의 비전을 제시해야 할 국책 연구기관의 전문가가 설 땅이 좁아지는 것도 우려되는 현상이다.

▽한국을 떠나는 인재들=국내 명문 사립대학을 졸업해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던 L씨(32)와 Y씨(31) 부부도 지난해 사표를 내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들 역시 공부를 마친 뒤에도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

국내 헤드헌팅 업계에 따르면 2001년 한 해에만 국내를 빠져나간 기술인력은 3000명에 이른다. 사정은 제각각일 것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비관이나 자녀교육 문제 등으로 한국보다 해외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인재가 적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지난해 발표된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두뇌유출지수’는 4.11로 집계됐다.

두뇌유출지수(1∼10)는 ‘전원 국내 잔존을 희망할 때’는 10, ‘전원 해외 유출을 희망할 때’는 1로 표시한다. 한국의 경우 고급 인력 10명 중 6명이 외국행을 바라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8.55) 일본(6.83) 등 선진국은 물론 싱가포르(5.58) 대만(5.09)보다도 자국(自國)에 남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적다.

인재의 해외 유출은 낮은 교육경쟁력과 겹치면서 기업의 핵심인력 부족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올 2월 서울에 있는 220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개 중 3개 업체(71.9%)가 ‘핵심인력이 부족하다’고 답변했다.

서울대 경영학과 박원우(朴元雨) 교수는 “선진국의 기업과 정부는 오래전부터 인재 유치에 총력을 기울여왔는데 한국 기업들은 최근에야 인재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고 정부는 아직도 외부 인력 스카우트의 무풍지대”라고 말했다.

▽서울대 공대는 지방대 의대보다 찬밥=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서울대 공대 가운데 가장 합격점(커트라인)이 높았던 학부는 전기컴퓨터공학부. 한국 첨단산업을 이끌어 갈 인력의 산실이다.

하지만 이 학부의 커트라인은 375점 수준으로 서울 소재 의대 치대 한의대 거의 대부분 학과보다 낮았다. 심지어 수도권은 물론 상당수 지방 소재 의대보다 인기가 없었다. 서울대 공대의 다른 학과나 미래의 기초과학 경쟁력인 순수과학 계열은 말할 것도 없다.

대학 진학자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위해 의대 치대 한의대 등 의학계열에 몰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국가경쟁력이란 관점에서 보면 큰 손실이다. 더구나 ‘과학 영재’들이 모여 있는 과학고 학생 가운데도 30∼40%가 의학계열에 지원할 의사를 갖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LG전자 김영기(金榮基) 인사담당 부사장은 “학교에서 공급하는 이공계 분야의 인력은 질적 양적 측면에서 모두 기업의 수요에 미치지 못한다”며 “기업들이 이들을 채용한 뒤 1년 이상 재교육시키는 데도 꽤 많은 비용이 든다”라고 귀띔했다.

▽있는 인재도 제대로 안 쓴다=기존의 ‘고급 두뇌’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국책 연구기관이 대표적이다. 수십 년간 전공 분야에서 노하우를 축적한 연구소들이 ‘코드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외면당하는 사례가 많다.

국제금융에 정통한 한 국책연구기관 박사는 “현 정부 출범 후 청와대에서 정책 조언을 요청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며 “자발적으로 정책 보고서를 올린 적도 있지만 반응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연구소의 중진 연구위원은 “유럽에서 사회주의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내가 ‘꼴통 반동 보수’로까지 취급받고 있다”며 “국책연구소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나이가 50줄에 접어들었다는 것 때문에 개혁 대상이 돼야 하느냐”고 하소연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선진 기업에선 리더뽑아 기업 DNA 집중 전수▼

선진 기업들은 일찍부터 인재 발굴과 육성을 위해 노력해 왔다. 오랜 경험을 통해 ‘인재는 태어나기보다 길러진다’는 원칙이 확립됐고 시스템으로 체계화됐다.

각 기업은 나름대로 인재상(像)을 정립해 인재를 판별하는 잣대로 삼는다.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은 1980년대 이래 ‘4E’를 척도로 삼았다. 에너지(energy), 동기부여(energize), 집중(edge), 실행력(execution)을 갖춘 직원이 GE의 미래를 이끌어간다는 뜻이다.

일본 소니사(社)는 ‘도전적인 창조’라는 인재상을 발표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인류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개념을 강조한다. 인간의 감성과 오락을 충족하는 세계적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장기 포석이 녹아 있다.

미국 존슨 앤드 존슨은 1943년 ‘우리의 신조’(our credo)라는 ‘리더십 스탠더드’를 만들어 인재를 키워왔다. 특히 ‘윤리경영’을 강조하는 것이 특색이다.

각 기업이 세운 잣대에 맞춰 차세대 리더들이 발굴되며 ‘기업 DNA’가 집중적으로 전수(傳授)된다.

GE는 입사 2, 3년 된 직원 가운데 0.5%가량인 300명의 ‘전사감사(全社監査)요원’을 선발한다. 이들에게는 사내(社內) 모든 캐비닛과 서랍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가 지급된다. 주요 프로젝트에도 투입돼 글로벌 시각을 기른다. 또 매년 하위 10%를 도태시키고 상위 20%의 우수 인력을 중점 관리하는 방식도 널리 알려져 있다.

소니도 매년 두 차례 최고경영자(CEO)를 중심으로 인사위원회를 열고 차세대 리더를 선발해 집중 관리한다. 회사의 노력 없이 리더가 성장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런 시스템은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히타치사, 미국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등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면 비슷하게 갖춰져 있다.

선발된 인재들은 회사가 정책적으로 경력관리를 한다. CEO와 직접 접촉하고 높은 경쟁력을 지닌 사내 경영 프로그램에서 위탁교육을 받는 기회도 주어진다. GE의 크론톤빌연수원이나 도요타 인스티튜트, 소니 대학 등은 인재 전문 교육기관으로 명성이 높다.

인재를 키우는 데 순혈(純血)주의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구미(歐美) 기업은 물론 최근에는 주요 일본 기업도 회사에 필요한 인재를 좋은 조건으로 과감하게 스카우트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조성용(趙成用) 인재개발본부장은 “선진 기업의 인력정책은 단순한 ‘구인’(求人)의 차원을 넘어 매력적 경영철학과 비전, 장기전략 수립 등으로 인재를 영입하는 ‘마케팅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진기업들의 핵심인재 유지 전략▼

1. 보상을 일정기간 분할해 지급

2. 수시로 불만 요인을 제거

3. 고속승진, 특별 복지 프로그램등을 통해 만족도 높임

4. 인재끼리 동료애 생기도록 지원해 사회적 유대관계 강화

5. 시장 변화나 프로젝트 기간을 고려해 근무 장소를 선정

6. 이직 성향이 낮은 사회성 있는 인력을 채용

자료:하버드 비즈니스 위크

▼전문가 진단▼

부모들이 과학고에 다니는 자녀들을 부추겨 의대로 보내려 한다는 말을 듣고 ‘이러면 안 된다’ 싶어 전국 과학고를 돌면서 강연한 적이 있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앞으로도 계속되면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달성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한국 경쟁력의 핵심은 전자 등 첨단산업이다. 세계무대에서 경쟁해야 하는데 이런 분야에 갈수록 낮은 점수대의 학생들이 지원한다. 반드시 수능 성적순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기초과학인 자연과학 계열은 공대보다 더 열악하다. 심지어 이공계에 진학해서도 상당 비율이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 책을 붙들고 있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의대를 선호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보수가 더 좋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자들은 사회에 나가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 상장기업의 최고경영자(CEO) 가운데 이공계가 20% 수준이고 80% 정도는 문과계열이다. 반면 미국 일본 유럽 등은 45∼60%가 이공계열이다.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잭 웰치 전 회장도 이공계 출신이다. 사실 선진국치고 과학기술 강국이 아닌 나라는 한 군데도 없다. 과학기술자들의 자부심도 있지만 국민들도 이들을 존경하는 분위기다.

이공계 기피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정부는 장단기 대책을 함께 쓸 필요가 있다.

단기적으로는 한국의 경쟁력을 맡은 석박사급 과학 두뇌들에게 병역혜택이라도 충분히 주어야 한다. 또 공직사회에 과학기술인력이 일정 비율 차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들을 제대로 평가해주는 문화가 정착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손욱 삼성종합기술원장

▼특별취재팀▼

▽권순활 경제부 차장(팀장)

신치영 이헌진 김광현 고기정

정미경 천광암 이은우 홍석민 기자 (경제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