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김정은, 불편한 손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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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1987년 9월 에리히 호네커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의 서독 방문은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에겐 결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회고록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양독 간 국경의 문을 더 활짝 열기 위해 나는 호네커의 방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호네커 방문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그때까지 내 입장이었기에 그 결정은 정말 어려웠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그의 방문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됐다.”

콜에게 동독은 다른 국가가 아닌 통일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 콜이지만 일단 방문을 수용한 만큼 ‘저쪽에서 오는 손님’의 요구에 따라 국가원수에 준하는 의전으로 예우했다. 하지만 의전은 말 그대로 형식적 의례일 뿐이었다.

공항 분위기부터 싸늘했다. 호네커를 영접 나온 사람은 총리비서실장, 그리고 녹색 베레모 쓴 군인들이 전부였다. 환영 현수막도, 환호성도 없었다. 공항에서 본 시내로 가는 고속도로 표지판에는 경찰이 서둘러 지운 나치 문양과 ‘호네커 살인자’라는 얼룩이 남아 있었다. 총리실 바깥에선 기민당 우파들이 ‘독일 통일조국’이란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

의장대 사열 땐 호네커와 콜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걷다가 뒤늦게 방향을 바로잡는 일도 벌어졌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악수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외신은 ‘의전행사 내내 콜과 호네커는 각기 다른 사람이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뻣뻣했다’고 전했다. 만찬에서도 두 사람은 날을 세웠다. 콜은 분단의 고통을 강조하며 장벽의 제거를 주장했고, 호네커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불과 물처럼 결코 화해할 수 없다”고 응수했다.

방문 마지막 날, 호네커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을 방문해 누이동생과 옛 이웃들을 만나고 부모의 묘지에도 참배했다. 주민들은 복잡한 감정 속에 호네커를 맞았다. 경호용 바리케이드 바깥에서 몇몇 사람은 “장벽을 철거하라”고 외쳤다. 한편에선 “에리히”를 외치며 동독 국기를 흔드는 사람도 한두 명 있었다.

서독의 차가운 대접은 호네커의 자업자득이었다. 그의 서독 방문이 콜의 우파 정부 이전인 사민당 총리 시절에 이뤄졌더라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임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1981년 12월 동독의 소도시를 방문했을 때 주민들은 난데없이 예비군훈련에 동원되거나 외출이 금지됐다. 거리는 비밀경찰 요원들로 꽉 차 있었고 “우리 서기장 만세!” 소리만 요란했다. 이런 삼류 코미디가 연출된 것은 1970년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독 방문 때 주민들이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 “빌리, 빌리!”를 외쳤던 기억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우리와는 사정도 다르고 이미 30년이 지난 동·서독 얘기가 길어진 것은 벌써 김정은 답방 대비에 들어간 정부나 일부 찬반 세력을 제외한 많은 이가 북쪽 손님을 어떻게 맞을지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모든 국민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을 믿는다는 대통령의 발언에 놀란 이들에게 요즘은 더없이 답답하고 수상한 시절일 것이다.

평양에서 받은 격한 환대에 감격했을 대통령으로선 그에 상응하는 환대를 준비하겠지만, 국민 상당수의 ‘북쪽 수괴’에 대한 심정적 거부감도 엄연한 현실임을 직시해야 한다. 격한 반대는 진작 예고돼 있다. 김정은도 “태극기 부대가 데모 좀 해도 괜찮다”고 했다. 물론 일부 격한 환영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차분히, 어쩌면 무심한 듯 지켜볼 것이다. 그게 우리의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식으로 응대하면 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김정은#호네커#슈미트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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