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美-北 사이 샌드위치 신세 면하려면 [청년이 묻고 우아한이 답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4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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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 결렬 이후 한반도 정세가 다시 불확실해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개성공단 남북연락사무소에서 철수하며 남측에도 불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국내정치에 몰두하며 북한에 대해서는 제재 이행만 강화하는 모양새입니다.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끊임없는 대화와 조율이 중요한 시점에서, 북한과 미국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리나라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그 과정에 어떤 점이 가장 중요한지 궁금합니다.

-차지현 연세대 경제학과 14학번(아산서원 14기)

A. 미국 국무부의 정례브리핑에 들어가면 각국의 주요 현안에 대한 질문이 쏟아집니다. CNN이나 워싱턴포스트, AP통신 같은 현지 주요언론에서 나온 상주 기자들은 물론이고 중동 아시아 유럽 등 각 지역에서 온 특파원들이 각각의 관심사를 질문으로 풀어내지요. 최근 베네수엘라 사태가 문제가 되었을 때는 관련 질문만 10분 넘게 이어진 적도 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40~50분 정도 진행되는 브리핑에서 북한 이야기는 요즘 5분 정도에 그칩니다. 1월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의 워싱턴 방문 때에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전 이를 준비하기 위한 물밑 움직임이 진행될 때에는 로버트 팔라디노 부대변인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면서 흥미로운 질의응답이 길게 이어진 적도 있지만, 요즘은 다른 이슈들이 더 많이 치고 올라옵니다.

로버트 팔라디노 미 국무부 부대변인이 정례브리핑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워싱턴=이정은 특파원
로버트 팔라디노 미 국무부 부대변인이 정례브리핑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워싱턴=이정은 특파원


답변에 앞서 국무부 정례브리핑을 언급한 이유는 그만큼 미국이 외교안보 분야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이슈들이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입니다. 브리핑 때마다 수없이 올라가는 기자들의 손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낯선 중동이나 중남미 문제가 치열하게 다뤄지는 것을 보면서 ‘북-미 협상 교착 국면이 장기화되는 어느 순간부터 북한 문제는 이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미국 국내정치 이슈도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북한 문제를 앞서는 관심사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는 시점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노이 회담 때조차 그런 분위기가 감지됐지요. 하노이 회담 당시 워싱턴을 지키고 있던 한 외신기자는 “TV에서 하루 종일 마이클 코언 청문회만 나와서 하노이 회담 기사는 별로 못 봤다”고 하더군요. 일반 미국인들의 관심사에서 북한 문제는 더 뒷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한동안 북한 문제에 침묵하는 듯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재무부의 대북제재를 취소시켰다는 트위터 글을 올리면서 다시 관련 언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 언제 끊길지 알 수 없습니다. 당장 22일 로버트 뮬러 특검이 ‘러시아 스캔들’ 관련한 수사 보고서를 완료해 법무부에 제출한 상태여서 워싱턴 정가는 이 내용을 놓고 다시 한 번 들썩일 조짐입니다. 그뿐인가요. 하반기부터는 사실상 2020년 대선 캠페인이 시작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괴롭히는 네 가지 국내정치 이슈. 동아일보 뉴스디자인팀
트럼프 대통령을 괴롭히는 네 가지 국내정치 이슈. 동아일보 뉴스디자인팀


북한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진전을 원하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하노이 회담 결렬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북한은 더구나 “비핵화 협상 중단을 검토할 수 있다”고 위협하고, 서해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 복구라는 도발 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워싱턴의 대북 강경파들만 더 자극하는 악수(惡手)를 두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무부의 추가 대북제재를 취소했다며 유화적 메시지를 발신한 만큼 이제 공은 북한으로 다시 넘어갔습니다. 북한은 미국이 요구하는 비핵화 로드맵의 마지막 단계(end state), 즉 모든 플르토늄과 우라늄 농축을 비롯한 핵 프로그램과 생화학 무기, 미사일 프로그램의 폐기라는 완전한 비핵화의 개념에 동의하고 그 이행을 위한 실무 협상에 다시 나서야 합니다. 미국 측은 이 답을 기다리면서 “지켜보자”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국 당국자들도 “빅딜이라는 것이 일괄타결식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는 입장입니다. 실제 미국은 종전선언과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사회문화적 교류와 인도적 지원 확대 등을 깊이 있게 검토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재 면제 등 제한적인 조치를 통한 남북경협 프로젝트 진행도 불가능한 옵션은 아닙니다.
지난해 11월15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참석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왼쪽)과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청와대 제공
지난해 11월15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참석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왼쪽)과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청와대 제공

이 과정에서 한국은 촉진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상황입니다.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결단하고, 다시 협상 테이블에 나와서 미국과 세부 이행사항들을 논의해 나가는 과정을 촉진하겠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 한미 공조가 흔들리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이 자신들의 편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편에서 미국에 제재완화 등을 요구하다고 보는 인식이 강합니다. 워싱턴에서는 “도대체 한국이 누구 편이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최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의 통화에서 “그래도 단계적 이행이 ‘빅딜’보다 낫다”면서 사실상 ‘스몰딜’ 수준의 합의 재고를 요청한 것은 이런 불신을 키우는 또 하나의 배경이 됐지요. 볼턴 보좌관을 비롯한 트럼프 행정부의 고위당국자들이 하나같이 일괄타결식 빅딜을 주장하고 있는 시점에 이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꺼내든 시점부터 좋지 않았다는 분석입니다.

동맹이자 비핵화 협상의 주체인 미국과의 공조가 흔들리면 자칫 한국은 북한과 미국 사이의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북핵문제만이 아닙니다. 국내 정치와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타격이 불가피합니다. 중국 일본 등 한반도 주변국들과의 글로벌 외교 현안을 다루기도 훨씬 힘들어집니다.

청와대는 한국의 대북 정책이 미국과의 공조 속에 진행되고 있으며, 같은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미국 측에 인식시켜야 합니다. 정제되지 않은 발언이나 설익은 중재 아이디어로 불필요하게 미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대북정책을 조율하고 알려나가야 하는 시점입니다. 매끄럽고 효율적인 촉진자 역할도 그 위에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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