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17년째 北 연구한 전문기자가 본 ‘김정은 신년사’ 의미는…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일 14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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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대의 유훈인 한반도 비핵화를 하고 싶지만 미국이 제 값을 치르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새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다시 만나 흥정하고 싶지만 그가 만족할만한 보따리를 가지고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난 핵능력을 진전시킬 수밖에 없다.’

김정은이 2019년 신년사를 통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굳이 의역해주면 이런 정도일 것입니다. 그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바라는 ‘비핵화의 제값’이 무엇인지도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발언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한미 군사훈련의 중단 △미국 전략자산 등 전쟁장비 반입 중지 △현 정전체계를 평화체계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남북관계에 대한 미국의 간섭과 개입 배제 △우리의 주동적이며 선제적인 노력(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등)에 대한 미국의 신뢰성 있는 조치(종전선언이나 제재 해제, 군사적 압박 해소 등) △상호 인정하고 존중하는 원칙에서 공정한 제안을 주고받는 협상 등입니다. 그러면서 “미국이 세계 앞에서 한 자기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그 모습을 강요하려 들고 의연히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고 위협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은 당장 나오지 않았지만 김정은이 내건 조건은 미국이 당장 들어주기 힘든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또 “올바른 협상 자세와 문제 해결 의지를 가지고 임하라”는 등의 충고성 발언은 강대국 미국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합니다. 대남 메시지에서는 전반적으로 한국 문재인 정부에 대해 호의를 베푸는 듯하지만 “이미 합의한 대로 대치 지역에서의 군사적 적대관계 해소를 지상과 공중, 해상을 비롯한 조선반도 전역으로 이어놓기 위한 실천적 조치들을 적극 취해 나가야 한다”며 사실상 한반도 이남 전역의 무장해제를 추구하겠다는 속셈도 드러냈습니다.

이상의 내용들은 전체적으로 자신들이 핵을 개발하고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책임을 미국에게 전가하면서 요구사항들을 늘어놓는 식입니다. 이를 통해 남한과 미국 진보진영 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한국이 북한의 요구사항을 전향적으로 수용해 비핵화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미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하여 선포하고 여러 가지 실천적 조치들을 취해왔다”고 강조한 것도 요구의 정당성을 확산하려는 발언으로 보입니다. 최근 ‘한반도 비핵·평화의 길’이라는 공저를 펴낸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북한이 핵실험 중단을 넘어서서 핵무기 생산도 중단했다는 주장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며 “만약 이것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한국과 국제사회는 북한이 2020년에 가서 100개 정도의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이상은 신년사라는 형식으로 공개된 ‘김정은의 말’을 토대로 그의 ‘의도’를 추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꼭 1년 전 2018년 신년사로 시작된 김정은의 대외 평화공세를 지켜보면서 지금도 풀리지 않는 근본적인 질문은 그의 진정한 의도와 비핵화 진정성입니다. 어떤 진영에서는 그의 말은 전혀 믿을 수 없으며 북한의 핵보유 굳히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반대 진영에서는 이른바 ‘개혁군주론’까지 들먹이며 김정은이 북한을 전혀 새로운, 국제사회가 바라는 길로 이끌고 있다고 홍보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로지 김정은의 말을 토대로 한, 심지어는 ‘김정은의 말을 전해들었다는 사람들의 말’을 토대로 한 정치적 추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늘 경계해 왔습니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서는 상대방의 말보다는 행동, 의도보다는 실제로 가지고 있는 힘의 정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적대적인 국가의 의도는 아예 알 수 없다고 가정합니다. 의도는 숨길 수 있거니와 있다가도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격적 현실주의자로 불리는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세 번째 가설은 어느 나라라도 상대방의 의도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특히 어떤 나라라도 상대방 국가가 공격적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국가들은 필연적으로 상대방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국제체제 속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점잖은 나라들이다. 다만 판단을 확신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나라의 의도를 100%의 확실성을 가지고 거룩한 것이라고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략) 더욱이 의도란 쉽게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국가의 의도가 하루는 점잖은 것 같아 보이지만 그 다음날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의도의 불확실성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들은 다른 나라들이 자신들이 보유한 공격적 능력에 부합하는 공격적 의도는 결코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중략) 이런 세상에서 국가들은 상대방에 비해 자신이 유리해질 수 있다면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냉혹한 힘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만약 평화를 조용한 상태 혹은 상호간에 조화를 이루는 상태라고 정의한다면 이 세상에 평화가 가능하다고 기대할 수 없다.”

김정은이 쏟아낸 신년사는 며칠 동안 이른바 북한 전문가들의 분석 대상이 되고 그의 말이 어떤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설들이 나올 것입니다. 이제 17년째 북한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의 말이 아니라 행동, 추정되는 의도가 아니라 추정되는 핵능력을 기준으로 우리의 대책을 마련하자고 촉구합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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