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을 빛낼 대한민국 100인]‘인재’는 어떻게 성장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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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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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여백’이 상상력 낳고, 부모의 ‘믿음’은 도약 밑거름
공부 압박 없는 어린시절 독서-음악 ‘가풍’ 즐기게돼
일탈 가까운 결단 내릴때도 “부모는 네편” 격려가 큰힘
“지금은 자녀방임 힘들지만 내 아이 결정은 존중할 것”


타고난 천재성이나 남보다 부유한 가정환경이 오늘의 인재를 만들었을까. 아니면 하루 세 시간씩 10년, 즉 1만 시간을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을 따랐을까.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이 ‘2020년 한국을 빛낼 100인’을 선정하면서 가졌던 의문이다. 오늘은 물론이고 10년 후에도 한국을 이끌고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100인의 성장과정과 자녀교육 철학을 통해 비결을 들여다봤다.

○ 빈곤과 열정이 동력

100인의 상당수는 1960년대에 태어나 현재 중고등학생 자녀를 뒀다. 이들은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해 특별한 점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부모가 생활에 쫓기느라 일일이 챙기지 않았던 게 오히려 상상력을 키워주는 계기가 됐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단백질 분자구조 분야의 촉망받는 과학자인 이지오 KAIST 교수는 자신의 강점으로 꼽히는 독창성은 어린시절 부모가 방관한(?) 결과라고 회상한다. 그는 “부모님이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아 시험 때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에 혼자 책을 읽거나 상상을 했다”고 말했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어려웠던 시대상황이 적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그는 실력 있는 학생 상당수가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고 4년제 대학입학률이 20%대에 그쳤던 세대. 모두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는 “결정적으로 학문의 길로 들어선 것은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 사회과학을 하고 싶은 열정이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열정의 대상을 찾은 것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얘기.

○ 부모의 신뢰가 경쟁력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해라.” 파생금융상품 분야에서 주목받는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경찰서에 붙잡힌 아들에게 이 한마디 외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적이 크게 떨어질 때 밤늦게까지 놀다가 야간통행금지로 잡혀가자 꾸지람을 들을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였다. 안 교수는 “평소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이 한마디는 나를 믿고 기다려 준다는 의미로 들려 내가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미국 시사주간 타임 아시아판이 ‘아시아 4인의 아티스트’로 선정한 패션디자이너 정욱준 씨도 부모의 신뢰가 인생의 전환점에서 큰 역할을 했다. 미대를 그만두고 대학졸업장을 포기하는 대신 패션전문학교로 갈 때 부모는 아들의 결정을 믿고 묵묵히 격려했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부모는 공부하라는 말 대신 위인전집과 백과사전, 추리소설을 집 안 가득히 들여놓았다. 잔소리 대신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믿고 기다려주는 교육방식이었다.

양성원 연세대 음대 교수(첼리스트)의 아버지는 양해엽 전 서울대 음대 교수. 그는 어린 시절 내내 아버지의 바이올린 연주와 어머니의 노래를 들었다. “어릴 때 프랑스 파리에서 생활하면서 학업 스트레스 없이 좋은 음악을 듣고 자란 것이 오늘날 나를 있게 해준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양 교수는 정리했다.

김창진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아버지의 자유분방함과 어머니의 공정함이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나를 성적과 과외가 지배하는 한국에서 보호해 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배움과 연구를 평생 이렇게까지 즐길 수 있겠는가”라고 감사했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유년 시절부터 천재성을 보였다. 아버지인 장재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장 교수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매일 두툼한 성인용 책을 한 권씩 읽는 모습을 보고는 누가 책을 더 빨리 읽는지 내기를 했다. 장 전 장관은 “초등학교 3학년이 서울대 법대를 나와 재무부에서 근무하던 나보다 오히려 책을 더 빨리 읽어 크게 놀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 아이는 결정을, 부모는 응원을…

100인은 자신들이 자랄 때 방식을 자녀에게 그대로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지오 교수는 부모의 간섭 없이 자랐지만 지금은 아이가 좋은 교육환경을 갖춘 대학에서 공부하려면 부모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대치동교육’으로 불리는 사교육을 전적으로 외면하기는 힘들다는 말. 그는 “현재의 중고교 교육과정에서 기르기 힘든 창의성과 독창성은 대학 입학 후에 키울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한숭희 교수는 누군가가 탈락할 수밖에 없는 경쟁구조가 고착화되는 현실에서 부모 혼자서 할 수 있는 여지가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100인의 조언에 나타난 공통점은 자녀가 적성을 찾도록 돕고 지켜보는 게 부모의 가장 큰 역할이라는 지적.

미국 스크립스연구소의 서동철 교수는 “한국 어린이가 학교 공부를 잘하고 정보를 기억하기 위해 너무 이른 나이부터 많은 걸 포기하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진짜 교육이 대학시절부터 시작되는 만큼 고교 때까지는 몸 안의 열정을 키우기 위해 자녀에게 자유와 시간을 충분히 줘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녀에게 사실과 근거, 논점과 의견, 그리고 감동적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아이들의 결정을 도울 뿐 대신해 주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가 모범이 되고자 나의 말과 행동이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아이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면 응원할 뿐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 아프리카 속담에서 ▼
■ 내 마음 속의 인용구

知所先後면 近道
먼저 할것과 나중에 할것을 알아야
待人春風 持己秋霜
남에겐 봄바람, 자신에겐 서리처럼 하라


지소선후(知所先後)면 근도(近道).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깝다는 뜻으로 사서삼경 중 대학(大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원규 ㈜세실 회장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지침으로 활용하는 내용.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가려서 제대로 해내고 싶은 바람을 담았다고 그는 설명했다.

100인 중에는 이 회장처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생활의 좌우명을 품고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이 많았다. 고전이나 옛 경전의 인상 깊은 문구가 자주 나왔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은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고 멀리 가고 싶으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을 인용했다. 고객 및 사회와 더불어 성장하며 나눔을 솔선수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만화 ‘파페포포’의 작가인 심승현 씨가 인용한 글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나오는 문장. “성급했기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났고, 게으르기 때문에 쫓겨난 낙원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조급함과 태만을 동시에 경계했다. 카프카에게서 얻은 그의 철학은 작품에도 반영됐다.

송영길 민주당 최고위원은 영국 시인 윌리엄 어네스트 헨리의 작품 인빅터스(invictus)를 인용했다. ‘정복되지 않는’이라는 뜻을 가진 인빅터스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26년 넘는 억울한 수감생활을 버텨내면서 수없이 읊조린 시이기도 하다. 송 의원은 에리히 프롬의 ‘소유나 삶이냐’도 언급하면서 “집행시기를 모르는 사형수처럼 한정된 인생을 살면서 소유가 아니라 존재하는 양식의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좌우명은 ‘불치이치 무위지치(不治而治 無爲之治)’. 일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일하고 다스린다는 뜻으로 당나라 태종이 얘기한 치도(治道)의 요체를 정리한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나오는 말이다. 오 시장은 훌륭한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업무노트 첫 장에 이 문구를 적어 놓았지만 “이런 원칙을 지키다 보면 현대 정치에서 잃는 것이 많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임태희 노동부 장관은 자신의 좌우명이자 신념으로 채근담에 나오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을 들었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자신을 대한 때는 가을서리처럼 하라’는 뜻. 정치인이 즐겨 쓰는 명언의 하나.

이연주 한국청년유권자연맹 운영위원장은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을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데 매사에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100인’ 특별취재팀

▽팀장 이진 경제부 차장

▽정치부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산업부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국제부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오피니언팀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인력개발팀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인터넷뉴스 팀 권혜진 기자 hj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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