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레그 그린]장기기증, 생명을 잇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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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그 그린 장기기증 홍보대사·전 BBC 기자
레그 그린 장기기증 홍보대사·전 BBC 기자
최근 서울에서 간호사 몇 명을 만났다. 아마도 의료계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을 하는 사람들이지 싶다. 그들은 한국장기조직기증원(KODA)에서 근무하는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들이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고인의 신체 부위를 다른 사람에게 이식해도 될지 묻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몇 시간 전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 교통사고나 낙상 또는 뇌중풍(뇌졸중) 탓에 뇌사 상태가 된 상황을 지켜보는 가족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다. 미처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라면 더욱 큰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런데 환자들은 심장이 계속 뛰고 있으며 전신에 피가 흐르고 있다. 따라서 몇 시간 동안 심장, 신장, 간 등 장기를 다른 환자에게 이식하면 그 환자들은 생명을 구할 수 있다.

물론 고인이 영면에 들려면 신체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족이 장기 기증을 결정하면 평균적으로 3, 4명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장기 이식 외에도 화상을 치료할 수 있는 피부, 절단 수술을 막을 수 있는 뼈, 눈이 멀지 않도록 해주는 각막을 기증할 수 있다. 이렇게 새 삶을 얻는 사람을 포함하면 숭고한 결정 한 번이 10명, 20명을 고통과 불안에서 구해낼 수 있다. 살아가면서 이만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을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들에게 이 같은 설명을 들은 뇌사자 가족들 중에는 슬픔을 뒤로한 채 동의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전 세계적으로 장기 기증은 아직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장기기증자 비율은 세계 평균에 가깝다. 다만 미국 등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으로 낮다. 거의 매일 대기 명단의 환자가 죽어가고 있다. 삶이 다한 뒤 내 신체를 기증하는 행동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결정을 내리길 잘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까지 장기 기증자 가족 수백 명을 만났지만 당시 결정에 대해 후회하는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고인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정한 순간이 슬프고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1994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던 나는 이탈리아로 가족 여행을 갔다가 총으로 무장한 강도를 만나 당시 7세였던 아들을 잃었다. 아들의 장기와 각막은 7명에게 기증됐다. 이 중 4명이 10대다. 이 결정으로 미국에서는 장기 기증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경험자인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장기 기증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가족을 잃은 슬픔을 덜어줄 수 있는 긍정적인 일이기도 하다.
 
레그 그린 장기기증 홍보대사·전 BBC 기자
#장기 기증#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기기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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