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트럼프, 무식이 화근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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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논설위원
이기홍 논설위원
다들 놀랐을 거다. “6·12 센토사 합의는 세계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극찬한 문재인 대통령도 속으론 놀랐을 거다. 이렇게 낮은 수준의 합의문에 그친 것은 모두의 예상 밖이었다. 그렇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될 걸 알았을까.

답의 실마리를 풀려면 지난달 26일로 돌아가야 한다. 정상회담 취소 발표 이틀만인 26일 회담 재추진 의사를 밝힐 때만 해도 트럼프는 북한 김정은의 납작 엎드린 자세를 보고 자신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회담 재추진을 발표했는데, 그 순간 돌아 나올 수 없는 열차에 올라탄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트럼프는 북핵 문제에 대해 거의 사전 지식이 없었다는 게 외교소식통들의 전언이다.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과 플루토늄 재처리의 차이 등 디테일에 대한 브리핑 자체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다 회담 재추진을 결정한 뒤에야 비로소 일주일에 8시간 상세한 브리핑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1991년 우크라이나 핵무기 폐기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넌-루거 법’의 당사자인 샘 넌과 리처드 루거 전 상원의원도 불러 설명을 들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트럼프는 비로소 북핵 문제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하지 않음을 깨닫게 됐다. 트럼프는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하니까, 통 크게 체제보장 약속을 해주면 원샷에 해결지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북한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적대시 정책’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주한미군 핵우산 평화협정 등 동북아 안보체제 전체에 칡뿌리처럼 맞물린 복잡한 것임을 뒤늦게 알게 됐다는 것이다.

사실 트럼프 뿐만 아니라 현재 백악관 고위 관료들 중에도 북한에 대해 경험과 이해도가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4월에 합류한 존 볼턴 안보보좌관이 그나마 2000년대 초 국방부 비확산담당 차관시절 북핵 이슈를 다뤘지만 북한을 직접 상대한 것은 아니다. 대북협상의 전면에 나서 있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외교관이 아니라 중앙정보국(CIA) 출신이다. CIA는 협상하는 곳이 아니다. 안보 협상은 정보전이나 통상협상과는 다르다.

더구나 수백~수천 명이 노동당 중앙위원회 산하에 배속돼 대남 대미 협상전략을 만들어내는 북한은 일반 국가 보다 몇 배 더 협상 난이도가 높은 상대다. 사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 그룹에도 북핵 협상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총괄팀장 격인 정의용 안보실장도 통상이 전공분야였다. 외교부의 북핵 전문가들은 현재 국면에서 소외돼 있다.

트럼프가 결국 전문가 긴급 수혈 차원에서 투입한 게 6자 회담 수석대표였던 성김 주 필리핀 대사였지만 북측은 비핵화에 대한 조금의 진전된 표현도 합의해주지 않았다. 성김-최선희(외무성 부상) 실무회담이 정상회담 전날 밤까지 근 보름이나 이어진 것은 합의할 게 많아서가 아니라 합의가 안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돌아나갈 수 없는 처지인 트럼프의 유일한 돌파구는 회담 전엔 대중의 기대치 낮추기와 회담 후엔 공격적인 자기홍보 뿐이었다.

그는 무력충돌 위기론이 생긴 원인의 상당부분이 자신에게 있음을 잊었는지 수백만의 목숨을 구했다는 등 자화자찬에 끝이 없다. 그러면서 김정은에 대한 극찬을 이어간다. 왜 그럴까.

이제 트럼프가 기대고 의지할 곳은 오로지 김정은과의 인간적 신뢰, 즉 구두 약속 뿐이기 때문이다. 계약서도 받지 않고 계약금만 덜렁 주고 온 남편이 “집주인 사람 좋아 보여, 걱정 마”라고 강조하는 것과 같은 심리다. 그리고 앞으로의 성패가 북한 체제의 특성상 김정은 개인의 감정과 판단에 크게 영향 받는다고 보고 계속 추켜세우는 발언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은 할아버지 아버지에게 가업을 물려받은 것일 뿐, 민주주의 국가라면 말단 보조직에도 선출되지 못할 인물”이라는 마코 루비오 미 상원의원의 말처럼 김정은을 신뢰해도 좋을 근거는 없다. 호텔 현관에 도착한 뒤 차에서 내려 마중 나온 나이든 측근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회담장으로 걸어갈 때 김정은의 거만한 표정과 잠시 후 트럼프 옆에 앉아 경청하는 태도를 보일 때의 순진한 표정, 그 이중성 중에 후자의 것만이 진실이 되기를 트럼프는 기대하고 있다.

물론 북-미 정상이 만난 것 자체만 해도 의미는 대단히 크다. 하지만 만남의 본질이었던 비핵화가 진전되어야 하는데 앞으로 폼페이오가 주도할 후속협상에 대해서도 북핵 전문가들은 낙관론을 주저한다. “정상회담에서도 좁히지 못한 비핵화에 대한 입장차를 실무회담에서 해소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트럼프는 절대 실패를 자인할 캐릭터가 아니다. 핵 추가 개발 능력 폐기, 보유 핵무기 일부 폐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 등을 얻어내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그 대가로 한미동맹과 동북아 안보체제의 일정부분을 내어줄 용의가 있을 것이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 북핵 협상 열차에 덜렁 올라탄 트럼프의 머리 속에는 ‘비공식적으론 핵을 갖고 있지만 공식적으론 비핵화를 약속한 북한과의 평화’가 차선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을지 모른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트럼프#북핵 문제#김정은#북미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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