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상자 수하물에 숨어…대학생 된 ‘탈북 출신 쌍둥이 자매’의 고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4일 16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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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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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밝히는 게 낫겠지?”

이란성 쌍둥이 자매는 요즘 자주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참 오랜만에 하는 고민이다. 지난 3년 동안 자매는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고등학교 친구들 모두 자매와 같은 출신이었다. 바로 “넌 어떻게 넘어왔어?”라고 물으면 됐다. “강을 건너는데 물고기가 붙을까봐 아빠가 날 비닐로 감쌌어”, “베트남 수용소에서 밥 같지도 않은 밥을 먹었어” 같은 답변이 돌아온다.

자매는 친구들에 비하면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자매는 4살이던 2003년 북한 회령에서 중국으로 탈북했다. 하지만 엄마는 자매를 두고 먼저 한국으로 향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다.

그 사이 중국 고아원에서 3년을 보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래도 구박받지 않고 밥도 잘 먹었다. 2007년이 되서야 자매는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당시 나무로 된 수하물 상자에 숨어 인천항에 들어올 때는 ‘걸리면 죽는 걸까’란 마음에 무서웠다. 나무 상자 내부가 너무 더웠지만 브로커 아저씨가 준 물 한 병뿐이었다. 그래도 ‘둘’이라서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새로 입학하는 대학의 전체 학생 중 자매 같은 출신은 손에 꼽을 것이다. 더욱이 평생 처음으로 자매는 떨어져 지내야 한다. 각자의 꿈을 찾아 가는 길이기에 정말 기쁘지만 걱정도 앞선다.

다음달 홍익대 디자인학부에 입학하는 언니 김수진 씨(19·가명)와 경인교대 초등교육과에 입학하는 김지혜 씨(19·가명) 이야기다. 탈북 학생인 자매는 한겨레고등학교(경기 안성)를 졸업하고 이번에 나란히 대학에 합격했다. 한겨레고는 탈북청소년을 위한 대안교육 특성화학교다.

● 놀림 견디게 해준 그림과 선생님

‘모두 고등학교에서 공부 잘 하던 친구들일 텐데 우리가 출신 밝히고 특별전형으로 입학했다고 하면 차별하지 않을까….’ 수진·지혜 씨의 고민이다. 한국에 오자마자 입학했던 초등학교 때가 자꾸 떠오른다. 한국 친구들을 처음 만나는 날, 담임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수진이랑 지혜 모두 북한에서 왔으니까 잘 해줘.”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북한 사람을 처음 본 친구들은 자매를 놀렸다. 수군거리는 게 어린 수진이와 지혜 가슴에 콕콕 박혔다. 그럴수록 이들은 서로에게 의존해야 했다. 6년 동안 같은 반에서 자매이자 친구로 지냈다.

수진 씨는 외로울 때마다 틈을 내 그림을 그렸다. 엄마가 일하러 나간 텅 빈 집에서 밥을 먹고 청소까지 하고 나면 텔레비전 만화를 보며 연필을 움직였다. 멋지고 예쁘고 언제나 즐거운 주인공을 그리다보면 기분이 좋았다. 한번도 제대로 배워본 적 없지만 그림은 늘 수진 씨를 행복하게 했다.

엄마의 공백을 메워준 건 당시 멘토 교사였다. 서울시교육청이 탈북 학생과 연결시켜준 교사로, 다른 학교 소속이었다. 멘토 교사는 집으로 와 자매에게 공부를 가르쳐줬다. 자매가 태어나 처음 영화랑 연극을 본 것도 그와 함께였다. 지혜 씨는 “엄마가 늘 바빠 사랑을 못 받았는데 선생님이 엄마 같았다”며 “정이 깊게 들었고 선생님이 돼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됐다”고 했다.

● 북한에서 온 게 뭐 어때?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자매는 일반 초중학교를 졸업한 후 한겨레고로 진학했다. 숙식을 해결할 기숙사는 물론 교복 급식 모두 지원해주기 때문이었다. 여느 학생처럼 사춘기를 겪으며 엄마와 떨어져 지내고 싶다는 생각도 약간은 있었다. 지혜 씨는 “엄마는 한국 교육 시스템을 잘 모르니 우리한테 신경을 잘 못 써주고 학원만 가라고 했다”며 “처음으로 지금까지 쌓였던 엄마에 대한 서러움이 폭발했다”고 말했다.

그 전까지 자매는 딱히 북한에서 온 걸 자각하지 못했다. 고향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서였다. 수진 씨는 “어릴 때 북한에서 아빠가 돌아가셔서 땅에 묻힐 때 우는 엄마 옆에서 나도 따라 엉엉 울었던 기억만 난다”고 했다. 더구나 초등학교 때 겪어야 했던 따돌림이 항상 마음 속 상처로 남아있었다. 자매는 늘 출신을 숨겨야 된다고만 생각한 이유다. 중학교 때는 북한에서 왔다고 밝히지 않았으면서도 친구들이 “북한은 빨갱이”라고 얘기를 할 때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런 자매에게 한겨레고에서 만난 친구들은 새로웠다. 북한과 중국에서 즐겨먹던 닭발과 해바라기 씨를 좋아하는 친구들 틈에서 자매는 문화충격을 겪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나는 탈북자”라고 말하는 친구들을 보며 자매는 부끄러움을 극복했다. ‘북한에서 온 게 뭐 어때서’라고 생각하게 됐다.

많은 친구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교 때 한국에 왔다. 한국 학생 수준의 공부를 따라가기 어려워 학교에서 직업교육을 받으며 자격증을 따고 졸업 후 바로 취업하는 탈북자 학생이 많았다. 이 틈에서 지혜 씨는 고독하게 공부했다. 학생회장이었고, 한번도 전교 1등을 놓쳐본 적 없다.

수진 씨도 처음에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 수시모집 원서접수를 앞두고 미술을 포기할 수 없다고 느꼈다. 수진 씨는 “장학금 받은 걸로 한달 학원에 다니며 실기를 준비했는데 다행히 잘 봤다”고 했다. 수진 씨는 한겨레고 역사상 처음으로 디자인 전공 대학에 진학했다.

자매의 합격에 제일 기뻐한 건 엄마였다. 엄마는 합격 소식을 듣고 “꺅” 소리 질렀다. 잘 먹이고 잘 가르치고 싶어서 엄마는 낯선 땅에서 밤낮 없이 일했다. 하지만 곁에 있어주지 못한 미안함이 늘 먼저였다. 인천항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딸들이 엄마를 몰라봤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자매는 믿고 있다. 대학 친구들은 자신들처럼 지난해 주민등록증을 받았고, 올해 학생증을 받는 똑같은 학생이라고. 지혜 씨는 “탈북 출신 선배들에게도 물어봤는데 출신을 밝히면 더 이상 묻지 않고 잘 대해준다고 했다”며 웃었다. 수진 씨는 “미술 실력 차이가 많이 날 것 같아 내가 먼저 북한에서 왔다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은 통일이 되면 북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한다. 수진 씨는 “한국의 애니메이션을 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지혜 씨는 “인생의 나침반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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