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숙선 명창 “낮엔 국밥 팔고 저녁엔 호텔무대… 그렇게 소리를 이었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오뚜기와 함께하는 오뚜기 인생]‘국악계 프리마돈나’ 안숙선 명창

귀여웠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 세곡동 집을 찾아갔는데 느닷없이 허니버터칩을 내왔다. “누가 줬는데 도대체 무슨 맛인지 궁금하다”며 웃었다. 그 표정은 계면도 아니고, 우조도 아니었다. 오현 스님이 왜 ‘오세(五歲)’라는 법명을 줬는지 알 것 같았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귀여웠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 세곡동 집을 찾아갔는데 느닷없이 허니버터칩을 내왔다. “누가 줬는데 도대체 무슨 맛인지 궁금하다”며 웃었다. 그 표정은 계면도 아니고, 우조도 아니었다. 오현 스님이 왜 ‘오세(五歲)’라는 법명을 줬는지 알 것 같았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국악계의 프리마돈나인 안숙선 명창은 재작년 만해문예대상을 수상한 뒤 설악산 신흥사 조실(祖室·규모가 큰 사찰의 최고 어른)인 오현 스님으로부터 법명(法名)을 하나 얻었다.

“이근배 시인이 늘 오라고 해서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노래도 부르고, (오현) 스님도 몇 번 뵌 적이 있어요. 만해문예대상을 받고 난 뒤 어느 날, 스님이 백담사로 오라고 하셔요. 갔더니 나 말고도 대여섯 분 더 계셨는데 대학총장님도 있고, 시인도 있고 그랬어요. 아마 하안거 해제에 맞춰 법회를 여는 날이었던 것 같아요. 법명을 하나씩 주시는데….”

그녀는 얘기를 하다 말고 느닷없이 기자를 향해 “저는 뭐였는지 아세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기습질문이라 바로 대답을 못하고 “글쎄요…”라며 쳐다보니 그녀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밤새 고민하셨는데 그냥 ‘오세’로 지으셨다는 거예요. 다섯 오(五), 나이 세(歲)를 써서 오세(五歲)라고…. 하지만 무슨 뜻이냐고 여쭤볼 수가 없었어요.”

기자가 오히려 숙제를 하나 얻은 느낌이었다. 무슨 뜻으로 지어주신 걸까.

찾아보니 스님이 계셨던 백담사의 부속암자 중에 오세암이 있었다. 백담사에서 약 6km가량 떨어져 있는 오세암의 한자가 바로 ‘五歲庵’이었다.

오세암에 깃든 전설이 흥미롭다.

1643년(인조 21년) 오세암을 중건한 설정(雪淨) 스님에겐 고아가 된 속가(俗家)의 네 살짜리 조카가 있었다. 스님은 조카를 절에서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월동준비를 위해 강원도 양양을 다녀와야 했다. 하룻밤은 자고 와야 하는 길이었다.

스님은 길을 떠나면서 어린 조카에게 “관세음보살을 잘 외면 부처님이 보살펴 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밤새 폭설이 내렸고, 스님은 결국 암자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듬해 봄, 눈이 녹자마자 암자로 달려갔지만 조카가 살아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린 조카가 법당에서 목탁을 치며 관세음보살을 외고 있는 게 아닌가.

너무 놀라 조카에게 물으니 관세음보살이 때마다 찾아와 밥도 주고 재워 주고 같이 놀아주었다는 것이다. 이 얘기가 바로 오세암에 전해져 내려오는 ‘오세 동자 성불(成佛)’에 관한 전설이다. 오세 동자의 얘기는 정채봉 작가의 동화로, 애니메이션으로 각색돼 더욱 유명해졌다.

그런 얘기를 생각하며 오현 스님이 안숙선 명창에게 준 법명의 뜻을 풀어보려니 오히려 더 헛갈리기만 했다.

그녀는 관세음보살 대신 어릴 때부터 심청가를 불렀다. 그녀가 나고 자란 전라북도 남원은 국악의 성지다. 판소리 다섯마당 중 춘향가와 흥부가의 배경지가 바로 남원이고, 오늘날 동편제 판소리를 정형화한 가왕(歌王) 송흥록이 태어나 활동한 곳도 남원이다. 지리산 자락의 남원 운봉에는 ‘국악의 성지’라는 이름으로 국악인들의 묘역까지 갖춰져 있다.

“심봉사가 어린 심청을 어르는 대목이 있잖아요? 밤새 젖을 줄 수 없어 아기가 기진하자 심봉사는 우물가로 가잖아요? 봉사라도 우물로 가는 길은 알 것 아니에요? 우물가에 가면 여자들이 모여 있으니까 젖이 나오면 젖을 주고, 젖이 아니면 쌀도 주고 반찬도 주고 그러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심청의 배가 뜨듯해지면 아기를 안고 ‘둥기∼, 둥기∼’하고 어르는 대목이 나오잖아요? 아무래도 (내가) 어리니까 어려운 건 못 가르치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그런 대목은 (나처럼 어린아이들이) 부르기 좋잖아요?”

안숙선의 외당숙은 동편제 판소리의 ‘적자(嫡子)’인 강도근 명창이고, 이모는 가야금 명인인 강순영.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국악에 접했고, 아홉 살 때는 아예 주광덕 명창의 문하로 들어갔다. 숙선은 남원의 ‘아기 명창’이었다.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숙선은 어머니를 도왔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3남 2녀를 키웠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려웠다.

“(어릴 때 심청가부터 배웠으니까) 부모님을 섬긴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집은 왜 이럴까’ 하고 환경을 탓한 적은 단 한번도 없어요. 제가 (노래로) 벌면 얼마나 벌었겠어요? (국악 하시는) 어른들을 따라다니면 심청이도 시켰다가 소리도 시켰다가….”

심청가가 그녀에겐 관세음보살이었다.

열아홉 되던 해, 그녀는 서울에 올라와 만정(晩汀) 김소희 명창(1917∼1995)에게서 소리를, 향사(香史) 박귀희 선생(1921∼1993)으로부터 가야금을 배운다. 안숙선의 ‘스승 복’은 유명하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국악을 평생의 업(業)으로 삼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김소희, 박귀희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걸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안했어요. 아니, 20대 때만 해도 이걸 꼭 해야 한다는 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오라고 해도 꼭 늦게 가고… 혼도 많이 났어요. 김소희 선생님은 내가 아프다니까 약을 지어놓고 오라고 하셨는데도 안 갔고, 머리를 있는 대로 온통 파마를 해서 박귀희 선생님한테 혼나기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음악이라고 하면 다들 ‘니나노’라고 생각했지만, 두 분 선생님은 ‘그게 아니란 말이다’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게다가 어머니 혼자 꾸려가고 있는 집안 살림을 도와야 했다. 결혼까지 하고 나니 더욱 그랬다. 시집을 가면 고생도 끝이겠거니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남편은 그냥 글 쓰는 옛날 선비 같은 사람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 신촌 시장 부근에서 순댓국밥 장사를 했다. 남편은 시어머니와 함께 몇 평 안 되는 가게에서 순댓국밥을 만들어 팔고, 그녀는 워커힐 호텔 공연에 나갔다. 1부는 전통예술을 하고, 2부는 무희들이 캉캉춤을 추는 그런 무대였다.

“거기 말고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설 무대가 없었어요. 나중에 텔레비전이 들어오면서 더 없어졌고…. 신촌 부근 연남동에 살 때였는데 오후 4시쯤 대한극장 앞에 가면 워커힐 호텔 버스가 있었어요. 그걸 타고 가서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면 밤 10시쯤 되곤 했어요. 그런데 식당에 돈이 좀 쌓이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 더 키우면 체인점도 하나 낼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갑자기 가게를 팔아넘기는 거예요. 남편이 돈 아낀다고 (순대 만드는) 주방장까지 내보내고 시어머니랑 둘이서 했는데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 쓰러지실 것 같다는 거예요. 남편은 정말 효자거든요.”

그 다음엔 인천의 소래면에서 젖소를 키웠다. 그땐 그게 유행이었다. 수도가 없는 곳이라 한참 내려가는 길가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우사(牛舍)를 치워야 했다. 소의 배설물은 엄청났다. 또 남편이 끄는 리어카를 뒤에서 밀며 풀도 베러 다녀야 했다.

그러다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 그녀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어릴 때 봤던 우리 음악환경은 유랑인생처럼 처절하고 슬펐어요. 천막 쳐놓고 그 안에서…. 그래서 더 확신을 못 가졌는데 창극단에 들어가니까 대극장 소극장 예술단 합창단 교향악단 등 여러 예술단체들이 있는 거예요. 거기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거죠. 여기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없이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음악도 새로 알게 되고, 그때부터 공부를 많이 했죠.”

특히 창극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만든 음악극. 서양의 오페라와 견줄 만한 우리 고유의 전통예술이다.

“창극단에 들어가면서 내가 갖고 있는 소리가 형편없다는 걸 알았어요. 연습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특히 1980년대 초부터는 주인공을 맡았는데 책임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어요. 집에 와서도 소리를 입에 달고 살고…. 당시 창극단이 지금 국립극장의 달오름 극장 자리에 있었는데 어느 날 연습하다보면 큰 유리창 밖으로 낙엽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아, 가을이네∼’하고 눈물을 짓다가 또 연습하고, 연습하다 또 내다보면 눈이 내리고 있고…. 그렇게 연습을 했어요.”

안숙선 소리의 절정은 역시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이다.

―다섯 바탕 완창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장편이라고 해야 할까요? 완창을 해야 그 안에 담겨 있는 우리 역사와 철학, 사람들의 삶을 온전히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춘향이 사랑을 어떻게 지켜내는지, 비록 천기(賤妓)의 자식이지만 사또에 굴하지 않고 조목조목 인간의 권리에 대해 얘기하는 것, 그리고 옥중가에서 장면이 확 바뀌면서 이도령이 나오고…. 우조계면이라지만 이도령은 진한 계면(界面)을 쓸 수가 없잖아요? 슬픈 걸 춘향이처럼 표현하지 못하니까.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었어요.”

계면조(界面調)에 대해 조선시대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계면이라는 것은 듣는 자가 눈물을 흘려 그 눈물이 얼굴에 금을 긋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에 반해 우조(羽調)는 우는 아이도 울음을 딱 그치고 까르르 웃게 만드는 ‘높은 조’의 활기찬 가락.

슬프면서도 즐겁고, 즐거우면서도 슬픈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모두 알고 싶어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다섯 바탕을 완창했다는 것이다.

이제 안숙선의 국악 인생은 60년이 다 돼 간다. 꼭 그런 세월을 되짚어보지 않더라도 그녀의 삶은 이미 소리가 된 듯했다. 마치 영화 ‘취화선’의 장승업이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 그릇(예술)과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 전통예술이 예전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속에서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잖아요? 흥부가 부자가 되자 놀부가 털어먹으려고 오잖아요? 그런데 흥부는 음식상부터 차리잖아요? 그걸 보면 예전에 손님들을 어떻게 대접했는지 알 수 있잖아요? 안성유기에 통영칠판, 그리고 은수저에… 그런 게 다 우리 생활을 말해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모두 중국 물건이잖아요?”

그녀는 한참이나 마치 흥부가를 부르는 것처럼 얘기하다 갑자기, “이러다가 판소리가 싹 없어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있다”고 했다.

2012년 그녀는 폴란드 바르샤바 페스티벌에 초청받았다. 공연장을 찾은 2000여 명의 관객들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녀의 흥부가에 빠졌다.

“처음엔 과연 우리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관객들이 너무 울고 웃는 거예요. 기립박수를 치고…. 나중에 인터뷰를 하는 데 외국 기자들이 ‘혹시 전생(前生)이 있다고 믿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런 질문은 처음이었어요. 좀 신령스러운 느낌을 받은 모양이에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웃으며) 있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소리로 보시를 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고 했고요. 내가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나서….”



가야금병창의 박귀희 선생(왼쪽)과 판소리의 김소희 명창. 네 살 위인 김소희 명창은 1995년에, 박귀희 선생은 1993년에 타계했다. 동아일보 DB
가야금병창의 박귀희 선생(왼쪽)과 판소리의 김소희 명창. 네 살 위인 김소희 명창은 1995년에, 박귀희 선생은 1993년에 타계했다. 동아일보 DB
▼“국악 위해 모든 걸 내놓은 스승님… 요즘 부쩍 꿈에서 뵙네요”▼

박귀희-김소희 선생과 운당여관


나이 탓일까. 안숙선은 요즘 들어 부쩍 돌아가신 선생님들 생각을 많이 한다.

“꿈에도 나타나시고…. 왜 나타나실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특히 향사(박귀희), 만정(김소희) 선생님은 나이가 들수록 존경스러워요. 속된 말로 그 정도면 배 두드리면서 잘살 수 있었어요. 그런데 향사 선생님은 서울국악예술고를 키우기 위해 운당여관의 절반을 떼서 학교에 줬어요. 나중에 학생 수가 늘어나니까 ‘내가 죽거든 (여관을) 다 팔아서 쓰라’고 하셨고요. 두 분은 서로 ‘형님, 동생’ 하면서 국악을 지키기 위해 평생 애를 쓰셨어요. 그래서 더 일찍 돌아가신 것 아닌가 싶어요.”

예전 지번 주소로 서울 종로구 운니동 65-1, 현재 서울 덕성여자대학교 종로 캠퍼스 옆의 월드오피스텔 자리에 있던 운당여관은 바둑대회, 특히 국수전의 대국 장소로 유명했던 곳이다.

조선 후기 궁중 내관의 ‘아흔아홉 칸’짜리 고대광실이었는데 1951년 당시 중요무형문화재68호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였던 박귀희 선생이 인수해 당호(堂號)를 운당(雲堂)이라 짓고 여관으로 운영했다.

향사는 그러면서 1955년엔 만정과 함께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민속예술학원을 세웠고, 60년에는 국악인들을 규합해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1992년 서울국악예술고(현 국립전통예술고)가 시흥동으로 옮겨 새 교사를 신축할 때 운당여관을 아낌없이 내놨다.

“두 분이 평생 소리만 했지 행정은 안 해보셨잖아요? 밤새 잠을 못 잤다고 해서 가보면 두 분이 학교 운영 때문에 끙끙대고 계신 거예요. 그래도 향사 선생님은 사업을 했으면 대단한 사업가가 되셨을 거예요.”

평생 연습밖에 모르던 안숙선이 요즘 들어 “일이 정확하게 보인다”며 ‘안숙선 이후의 국악’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만정, 향사의 현몽(現夢) 때문인지 모른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