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분쟁 치른 中-러, 지금은 경제국경 허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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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우호와 갈등의 ‘롤러코스터 역사’ 마침표 찍나

《 “러시아와 중국은 새로운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에 진입했다. 양국 교류 역사상 최고의 협력 단계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5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회담을 앞두고 중국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양국 관계는 ‘시-푸 체제’ 등장 이후 한두 해 만에 급속히 달아올라 외교 군사 경제 등 전 분야에 걸쳐 최고의 밀월을 맞고 있다. 특히 러시아가 ‘아시아 재균형’ 정책에 나서고 중국이 미국의 ‘아시아 중시’ 정책에 맞서면서 양국 관계가 한층 단단해지는 양상이다. 》

○ 국경 분쟁하던 양국관계 동맹 수준으로

시 주석은 지난해 3월 국가주석에 취임한 뒤 첫 해외 방문국으로 러시아를 택했다. 시 주석 취임 뒤 아홉 차례, 올해 벌써 네 차례 푸틴 대통령과 만났다. 두 사람은 그때마다 양국 관계는 물론 국제 문제들도 긴밀하게 논의했다.

시 주석은 11일 타지키스탄 두샨베에서 열린 14차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서 푸틴 대통령, 차히아긴 엘베그도르지 몽골 대통령과 만나 ‘3국 간 경제 주랑(走廊·corridor)’을 구축하는 데 합의했다. 철도와 도로 건설, 통관 간소화, 3국 간 전력망 연결 등이 주요 내용이다. 1969년 ‘국경 분쟁’까지 치렀던 중-러가 국경 허물기에 들어간 셈이다.

관영 런민(人民)일보와 홍콩 밍(明)보는 12일 “중-러 양국 기업이 연해주 하산의 자루비노에 대형 다목적 항구를 공동 건설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2018년 완공 예정인 중국의 자루비노항 공동개발은 경제적 의미 이상이다. 중국의 오랜 염원이었던 ‘동해 진출’의 숨구멍을 틔우고 북한 나진-선봉 의존을 줄이는 전략적 가치도 있다.

러시아는 1860년 청나라 말기 ‘협박과 기만’ 전략으로 총 한 방 쏘지 않고 ‘베이징 조약’을 체결해 하산을 포함한 우수리 강 동쪽 땅을 차지했다. 이로써 중국은 동해 출구가 막히는 굴욕을 겪었다.

5월 20일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이 상하이(上海) 정상회담에서 시베리아 천연가스(약 4000억 달러 규모) 협상을 타결한 데는 러시아의 전략적 필요가 더 컸다는 분석이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합병해 주요 8개국(G8)에서 배제되고 서방의 경제제재가 강화되자 ‘러시아판 아시아 재균형’ 정책으로 대응했다. 중국 역시 미국의 ‘아시아 중시(피벗 투 아시아)’에 맞서고 군사 대국화로 치닫는 일본을 억제하기 위해 러시아가 필요한 상황이다.

두 정상은 같은 날 오후 ‘해상협력-2014’ 연합군사훈련 개막식에 나란히 참석해 ‘군사동맹’ 사이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내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행사’도 공동 개최할 계획이다.

7월에는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브릭스(BRICS) 5개국 정상이 브라질에서 ‘신개발은행(NDB)’ 설립에 합의했다. 상하이에 본부를 둘 NDB는 미국 주도의 금융 질서에 중국 주도의 대항마가 될 가능성이 높다.

○ ‘신밀월’ 대세 속 복병도 없지 않아


중국과 러시아는 지금 신밀월을 맞고 있지만 과거에는 갈등과 우호의 시기를 번갈아 겪었다.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열린 1차 공산당 대표대회에는 13명의 중국 대표 외에 옛 소련 주도의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의 극동제국담당 집행위 대표 마링이 참석했다. 이처럼 소련과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의 산파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 기간 이념적으로 지도했다. 1928년 6차 당 대회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됐다.

하지만 공산당이 국민당에 쫓겨 대장정을 하던 1935년 1월 구이저우(貴州) 성 쭌이(遵義)회의에서 농촌 혁명을 위주로 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지도 노선을 택한 중국 공산당은 소련과 멀어진다.

1949년 10월 중국 신정부 수립 뒤 양국은 사회주의 국가의 유대를 살려 우호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소련은 중국의 공업화를 지원한다. 이런 밀월도 잠시.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스탈린 격하에 나서자 중국은 수정주의라고 비난하고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로 몰아붙여 이념적 갈등이 시작됐다.

중소 양국은 1969년 우수리 강의 경계 획정을 놓고 급기야 전쟁까지 벌였다. 당시 국경에 배치된 소련군 병력은 최대 42개 사단, 100만 명 수준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중국이 1970년대 미국과 국교를 재개한 데는 소련의 위협에 맞서려는 목적이 컸다. 덩샤오핑(鄧小平)이 미국과 수교 직후인 1978년 1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소련 위협론을 강조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로마 정치인 카토가 모든 연설을 ‘카르타고는 망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마무리했듯 덩은 ‘우리 모두 소련에 맞서야 한다’는 전매특허의 훈계를 했다”고 말했다.

양국 화해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 등 ‘신사고 외교’가 큰 계기가 됐다. 이어 중-러 양국은 2005년 6월 유럽에서 극동까지 약 4300km에 이르는 ‘중-러 국경협정’ 비준서를 교환해 국경 분쟁을 완전히 해결했다. 21세기 들어 양국은 BRICS(2009년 6월 1차 정상회의)와 SCO(2001년 6월 설립) 등을 통해 유대를 강화해 왔다.

양국의 신밀월 분위기에는 위협요소가 없지 않다. 러시아가 중국과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베트남에 잠수함을 수출해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또 서방과 러시아의 신냉전이 장기화하면 중국이 계속 러시아 편을 들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러시아#중국#중러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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